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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Nov 22. 2024

푸르름을 간직한 너에게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해.

몸에 맞지 않는 투박한 옷을 입고 나를 기다리던 너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네게 어울리지 않는 그 옷을 살며시 벗겨내고, 네 몸을 처음으로 씻기던 순간을 기억해.

물이 너무 차가워서 혹여 네가 놀랐을까 허둥대며 수도꼭지를 잠갔었지.

네 몸은 물살에 부드럽게 휘어지기도 하고 꼿꼿한 채로 물을 튕겨내기도 하면서 내 손의 움직임을 받아들였어.

매끄럽기도 하고 까끌거리기도 했던 너의 감촉이 아직도 손가락 끝에 남아있는 듯해.


네 몸의 일부와 마찬가지였던 너의 과거를 너와 분리시켜 흘려보내면서

그것들과 단절된 채로 살아본 적 없는 네가 과연 괜찮을 수 있지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나.


영문을 모른 채로 낯선 곳에서 지내게 된 너를 위해

너에게 꼭 어울릴 것 같은 늘씬하고도 품이 넉넉한 옷을 고르고,

네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었어. 


오전 나절에만 햇빛이 잠깐 들어오는 원룸에 살시절에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방에 불을 켤 때면,

방을 쨍하게 밝히는 빛이 형광등이 아니라 나를 맞아주는 너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

네 존재만으로 나의 밤은 낮처럼 환해지고 답답한 공기가 산뜻하게 바뀌는 것 같았지.

너를 바라보고 있으면 봄날의 햇살을 쬐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

나의 온 세상이었던 작은 방 한켠에 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곤 했어.


너는 강렬한 햇살보다 은은한 빛을 좋아한다고 너를 잘 아는 이에게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원룸이 네가 편하고 아늑하게 지내기에 딱 좋을 거라고,

누군가에게 햇살 같은 존재인 채로 산다는 건 너에게도 꽤 근사한 일일 거라고,

그러니까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역시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거라고 확신했어.


너는 나의 집에, 우리의 생활에, 건강하게 잘 자리 잡은 듯했지.

너와 나는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만족스러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어.

빨래를 널고 돌아서다 마주친 너에게서 자세히 보아야 알아차릴 수 있는 귀여움을 발견했던 주말 오후에,

하룻밤만에 성숙한 얼굴이 되어 나를 맞이했던 어느 아침에,

나를 놀래키고 환희하게 했던 너의 모든 비언어들이 네가 행복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너를 보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그때의 너는 나의 기쁨이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의 너는 글쎄..

이제 너를 보면 기쁘기보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너의 사소한 변화에도 경탄을 금치 못했던 시절이 지나고,

너의 모든 요소가 눈에 익고 익숙해져 너로 인한 감정들이 닳아가고

내 눈길, 내 손길 밖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너를 어쩌다 발견했을 때조차

구차하고 끈질기다는 생각을 하며 냉소했던 시절도 지나가고,

초라하고 노쇠한 모습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너에게 연민을 느끼는 지금에야,

이런 생각들을 해 봐.


내 욕심으로 내 곁에 머물게 된 네가, 만약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진 않았을까.

너는 그동안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너와 마주 보며 웃던 매일 속에서

너도 나를 보며 기뻤을까.

내가 결혼을 하고, 이사를 하고, 집을 비우며, 한 달에 한두 번 너를 찾아와 미안한 얼굴을 하고 돌아 섰을 때,

그때 너는 나를 원망했을까.

내가 너를 까맣게 잊은 듯 지냈던 수많은 날들 속에서

몸이 하루하루 말라가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때

살아있다기보다 죽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을 때

너는 나를 기다렸을까,

필사적으로 살고 싶어 괴로을까,

마지못해 살아있는 생을 그만두고 싶을까,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너의 운명을 한탄했을까.




너를 발가벗긴 채로

삶과 죽음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그저 목숨만 부지하는 형태로 살게 한 건

나의 이기심과 무책임이 야기한 비극이었다 것을 인정해.


너의 푸르름이 좋아서

너의 푸르름을 내 곁에 오래 두고 보고 싶었고

 마음이 너에게도 이로울 거라 여겼는데,

너를 내 곁에 오래 두려고 네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버린 선택이

나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이 되어버릴 거라는 걸 

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나와 함께 했던 삶이 너에겐 어땠는지 때때로 궁금하다가도

너와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곤 해.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났을 때 너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중에 가장 싱그러웠던 것 같아.

이국적인 공기를 가득 품은 네가 도도하게 앉아있을 때면 그곳이 어디든 청량함이 드리워졌지.

맞아, 그때의 너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어.

가는 곳마다 분위기를 바꿔놓고, 주변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어 너를 넋 놓고 보게 만드는 묘한 정취가.




너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 나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은 나는 아직 철들지 못했나 봐.

별로 해준 게 없는데도 늠름하게 잘 살아준 네가 참 경이롭고 대견스러워.

네게 받은 행복을 돌려주지 못해서, 너의 멋진 모습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

그래도 살아있어 줘서, 곁에 남아 있어 줘서 고마워.




6년 정도 수경재배 방식으로 키운 테이블 야자에게 전하는 글입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면 물 주는 것을 까맣게 잊기도 해서, 오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수경재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싱싱했던 녀석은 갈수록 비실비실해졌고, 처음만큼 관심을 주지 못하다 보니 시들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게으른 인간이라 다시 흙에 심으면 물 주기를 잊어 녀석을 죽일 것 같아 흙에 심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어느 문득 녀석을 흙 대신 물속에서 살게 한 것이 마치 식물에게 식물인간(식물?) 선고를 내린 것 같다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식물인간,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녀석이 하얀 병실에서 링거에 의지한 채 미동 없이 누워있는 창백하고 여윈 사람으로 의인화되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테이블 야자의 모습을 나의 상상과 겹쳐 보면서 생명의 가치와 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저 연명하기만 하는 삶이, 녀석에게 과연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었을까, 내가 녀석에게 너무 잔인한 짓을 한 건 아니었을까..


누렇게 시든 잎을 잘라내고 남은 잎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 녀석을 그만 버려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왠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특급처방으로 수경재배 식물에게 좋다는 미원가루 탄 물에 목욕을 시키고, 물을 자주 갈아주며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끈기 있게 조금씩 자라난 녀석은 통통해진 줄기 아랫부분에서 연둣빛 싹을 삐쭉 밀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옹그린 작은 잎들 매단 채 얇은 피막에 싸여있던 가지를 쑥 뻗어내 수줍게 손을 내민 듯한 모습으로 자라났습니다. 그저 연명하는 삶이라도 버티며 살 가치가 있는 거라고, 산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살다 보면 새로운 기회나 시절이 오기도 하는 거라고, 녀석이 온몸으로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테이블 야자를 들여다봅니다. 말 못 하는 생물일지라도 관계를 맺음으로써 많은 것들을 주고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녀석의 강인한 생명력에 오늘도 숙연해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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