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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Jan 16. 2020

휴가 공상

샐러리맨의 기쁨

2020년 올 해는 입사한 지 만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풋풋했던 스물다섯에 딱 10년을 더하고 나니

어느새 아이 둘을 낳은 아줌마 과장이 되어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나의 커리어 성장이 쭉 그려지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근속 10주년 기념으로 주어지는 열흘(주말 제외) 간의 안식휴가와 100만 원의 축하금이 기다려지는 세속적이고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이제 막 1월 업무가 시작된 터라 당장 안식휴가를 떠날 수는 없겠지만 탁상 달력을 넘겨가며 언제 휴가를 쓰면 좋을지, 어디로 떠날지 생각만 해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어깨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랄까.


열흘간의 휴가가 주어지면 무엇을 할지 몇 가지 안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 없이 혼자 여행하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극기훈련에 가까우니까 남편의 일정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려면 2주를 꽉 채워 다녀오는 것은 힘들겠지만 상상은 내 자유니까 하고 싶은 것들 위주로 안을 짜 본다.

아직 어린 둘째를 고려해서 국내 위주로, 자연과 가까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일정으로.


1안. 제주도 2주 살기

그동안 제주에 가면 길어야 3박을 하고 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2주 정도 일정으로 에어비앤비 숙소를 빌려 아이들과 함께 원 없이 바닷가에서 놀고

동네 식당에 들러 해물 된장찌개를 먹는 일상을 보내고 싶다.

아이와 함께 제주에 갈 때면 공항에 내려 숙소로 이동하는 시간 조차 아까워서

서귀포 쪽보다 제주시내에만 짧게 머물렀는데,

체류기간이 길다면 서귀포까지 내려가도 될 것 같다.

중문 관광단지의 특급 호텔에서 하루정도 보내면서 몸과 마음의 호사를 누려보고,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머물며 하루 종일 바다 내음을 맡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제법 큰 첫째를 데리고 한라산에도 올라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이 위주로 돌아다니느라 위시 리스트에만 있었던 방주교회도, 포도호텔도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  



2안. 강원도 2주 살기

제주도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또 차량 렌트를 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면, 강원도는 집에서부터 자동차로 움직일 수 있으니 이동이 훨씬 수월한 여행지이다. 게다가 산도, 바다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둘째도 좋아할 만한 양 떼 목장부터, 워터파크도 있고 가족탕으로 즐길 수 있는 온천도 있고, 설악산이며 강릉 해변이며 내가 좋아하는 테라로사 커피도 있고 남편이 좋아하는 찐빵도 있고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원주, 대관령, 강릉, 양양, 고성, 속초 각각의 특색이 멋진 강원도!

강원도 도처에 흩어져있는 자연 휴양림을 공략해봐도 좋을 것 같다.

얼마 전 알게 된 자연 휴양림 예약 사이트에 접속해서 보니, 평일 비수기 기준 숙박비용이 말도 안 되게 저렴하다.

4인 가족이 머무를 수 있는 통나무 독채 숙소가 1박에 4~6만 원 선이다.

호텔 조식도, 사우나도 없지만 숲 속을 놀이터 삼아 실컷 놀다가 간단하게 준비한 식재료로 밥 해 먹고 따뜻한 방 안에서 다 같이 잠드는 일정은 어떨까.

하루 정도는 강릉에 있는 씨 마크 호텔에 묵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언제나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얼마 전 읽은 윤광준의 <내가 사랑한 공간들> 책에 실린 씨 마크 호텔에 대한 글을 읽으니 더욱 가보고 싶어 졌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부르는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인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했고, 독일의 산업 디자이너 잉고 마우러의 조명이 매달린 로비에는 가구 디자이너 조지 나카시마의 원목 의자가 길게 늘어져 있단다. 그 원목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면 실내가 온통 바다로 이어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고.

무엇보다 아래의 문장이 나를 설레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바다와 산, 호수가 동시에 보이는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룸을 얻어야 한다. 씨 마크 호텔의 진면목은 이 공간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경포 해변의 풍광과 기억이 온몸으로 스며들지 모른다. 하루를 통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의 효과가 주변의 자연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동쪽 바다는 신비한 아침을 열어주고, 대낮의 안목항과 경포호는 생동감으로 활기차며, 저녁의 태백산맥은 장엄한 깊이로 묵직해진다.”

- 윤광준, <내가 사랑한 공간들>, 62페이지



3안. 휴가를 미룬다. 내년 초등 입학을 위해서.

가장 현실적인 안이면서, 아쉽기도 한 안이다.

안식휴가는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1년 유예가 가능하다고 한다.

내년은 나에게도, 우리 가정에도 특별한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

둘째 덕분에 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또 휴직을 하기는 쉽지 않으니

3월 신학기 시즌 또는 아이의 첫여름방학 때 2주 정도 휴가를 낼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뤄두면 유용하게 잘 쓰이겠지만 모처럼 길게 쉴 수 있는 휴가를 이렇게 보내려니 아쉬운 마음도 든다.


어쨌거나 1~3안 모두 초점은 ‘가족과 함께’이다.

어디에 있든, 어떻게 보내든 가족과 함께 행복하면 그걸로 된 것 같다.

회사는 지금 예년보다 살짝 늦은 조직개편으로 인사이동이 한창이다.

그중 어느 임원이 퇴임하시면서 보내신 메일의 문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샐러리맨, 가진 거라곤 몸 하나뿐입니다.

가족, 행복, 건강 잘 챙기시고, 운동 열심히 하시고, 틈틈이 짬 날 때 일하세요.”


공기도, 분위기도 건조한 사무실에서 다가올 안식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상상하면서

잠깐 기분전환을 했다.

오늘도 머릿속으로 휴가를 꿈꾸며 일하는 세상의 모든 샐러리맨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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