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방학 때 3학점을 준다는 말에 혹해 KBS 영상미디어팀 인턴을 신청한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사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회색 추리닝 치마에 목이 다 늘어난 흰색이었을 티셔츠를 즐겨 입었다.
지금은 그분의 직급도 성함도 심지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사무실 한편에서 식후 믹스커피를 마시며 나눴던 대화는 아직도 선명히 그려진다.
“서윤씨, ㅇㅇ씨도 여기 다니면서 자기 월급으로 등록금 내면서 석사 땄어요.”
“서윤씨도 대학원 다니면서 직장 생활할 수 있어요.”
“저는 직장 다니지 않고 작가만 할 거예요.”
아주 세기의 화가 납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재적을 당했으며 두 번의 직장 생활을 경험했다.
그리고 현재는 이것저것 하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일정한 수입이 끊긴 후로 내 직업은 취미 생활자라 할 수 있다.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으니 취미 생활자가 아닐 수 없다.)
혹시 무슨 일하세요?
하고 물으면 처음에는 ‘전시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일러스트 작업도 하고 글도 가끔 씁니다.’
라며 주절주절 얘기했지만 결국 이런 잡다한 설명이 뭐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나를 보여준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상황에 맞게, 내키는 대로 말하고 다닌다.
“책에 들어가는 삽화 그리는 일을 합니다.”
“그림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운동하며 쉬고 있습니다.”
“그냥 놉니다.”
종종 을의 입장이 되어 판교에 있는 큰 건물에서 미팅을 할 때면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과 멋진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어른다운 대화를 할 때가 있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늘 그래 왔던 사람처럼 차분하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건물을 나와 근처 버스 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걷는다.
그러다 바리바리 싸온 노트북과 그 많은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오는 만원 버스에 간신히 끼여 타서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면 생각이 많아질 때가 있다.
‘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저런 공간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맛있는 커피를 즐기며 살아갈까.’
‘나는 왜 저렇게 멋진 삶을 너무 늦게 생각했을까.’
그러다 다시 집에 도착해 미팅한 내용을 정리하고 자료를 수정하고 다음을 준비하고.
잔상은 계속해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