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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책을 말한다. (자전거 여행, 김훈)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238852575



내 인생책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에게 글의 위대함을 알려준 책이다. 세상은 설명서처럼 쓰여질 수 없는 것이고, 쓰여질 때라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려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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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살의 김훈은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자전거 여행을 했다. 자전거를 타며 연필로 글을 썼다. 김훈은 언제나 연필로 글을 쓰는데 그의 책상엔 작아져버린 연필로 가득하다. 그래선지 김훈의 글에서는 연필의 악력이 느껴진다. 페달을 밟고 오르는 힘의 부침과 오르막에 도착해 풍경을 조망하는 감각의 현재가 느껴진다. 문장의 힘이 덩어리로 밀려온다. 순간 시간이 잠시 멎는다.



김훈은 경험을 관찰하여 쓴다. 읽은대로, 배운대로 쓰지 않는다. 김훈의 글은 여기서 나온다. 자전거여행은 앉은 자리에서 쓴 글이 아니다. 읽어보면 바로 읽힌다. 그날 그날 언덕을 숨차 올랐던 허벅지와 내리막 바람을 맞으며 스쳐갔던 산과 계곡과 밤과 노을이 글로 변해 있다. 정의와 진리를 얘기하지 않는다. 삶과 자연을 느끼고 쓸 뿐이다. 김훈의 글은 관찰의 글이어서 표현과 문장이 언제나 새롭다. '관찰'이 김훈을 만든다.



사물과 현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어렵고, 귀찮고, 불편한 일이다. 읽었던 문장, 배웠던 사실, 인정된 과학으로 글을 조립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편하다. 정리된 앵글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모든 게 아는 것 같고, 궁금한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그들에겐 매일의 반복만 있다. 그렇게 살아가도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훨씬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읽고 배웠던 것만으로 사는 인생은, 관용구와 뉴스로만 살아가는 인생은,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인생 아닐까.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김훈은 스스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라고 말한다. 어렵고, 귀찮고,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나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어떻게 생기는가. 모르겠다. 태생적일수도 있고, 후천적일수도 있다. 호기심의 정도와 범위가 변해간다는 것만 안다. 호기심이 있어야 관찰할 수 있겠지만, 관찰하다보면 호기심이 생긴다. 글로 쓰다보면 다시 호기심이 생긴다. 내가 아는 건 겨우 이 정도다.



글을 잘 쓰려면 뎃생을 해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물을 자세히 보는 태도가 글쓰기의 힘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그림을 그렸던 헤르만 헤세가 떠오른다. 김훈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이 느낌이 글로 어떻게 표현될까 스스로 궁금했을 것이다. 글을 이용해 스케치도 하고, 채색도 하고, 이야기도 붙였을 것이다. 차분히 주변을 보고, 관찰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구름이 변해가는 모양, 석양에 따라 변해가는 자연의 색깔, 등대의 반짝임을 생각했을 것이다. 김훈의 서재에는 책이 거의 없다고 한다. 있는 책이라곤 각종 사전, 업무매뉴얼, 도감 등이다. 김훈이 글쓰기에 필요했던 것은 세상의 원리이지, 새로운 정보나 관용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대로 써내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훈의 글을 읽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에 대한 글이 곳곳에 있다. ‘가까운 어둠’과 ‘먼 어둠’, ‘동백, 매화, 목련의 절정’, '냉이와 쑥', '동해의 강과 서해의 강', ‘밀물을 받아들이는 강’, '산길의 나아감'을 쓴다. 등대에 관해 김훈이 쓴 글도 인상적이다. 등대는 그냥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소록도, 소록도' 외친다고 말한다.



등대는 저마다 하나의 독자적인 신호체계로 깜박인다. 등대는 저마다의 고유한 신호를 쏘아대며 등대 자신의 위치를 선박에게 가르쳐준다. 여기는 선미도, 여기는 속초, 여기는 울릉도, 여기는 오륙도라고 등대들은 밤새도록 깜빡이며 외친다.

자전거 여행, 김훈


가까운 어둠은 흐려서 부드럽고 먼 어둠은 진해서 칠흑이다.

자전거 여행, 김훈

이 문장으로 나는 가까운 어둠이 부드럽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맞아. 그렇지' 하면서 말이다.


강이 바다로 다가갈수록, 거기까지 따라온 산들은 낮고 멀어져서 일몰의 조강은 광막한 소멸의 정서 속에서 아득하다. 조선의 화가들은 이 하구의 먼 산들을 잔산이라고 불렀다. 잔산은 공간을 분할하지 않는다. 잔산은 공간 속으로 풀어져서 오히려 공간의 무한감을 완성시켜준다.

자전거 여행,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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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칼의 노래' 첫문장


김훈하면 '문체'다. 강력함과 통찰력을 가진 짧은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칼의 노래 첫문장인데, 김훈을 대표할만한 문장이다. 이 웅장한 문장은 책을 읽기전에도, 다 읽고나서도 힘을 읽지 않는다. 오히려 강해진다.



이런 문장이 우연히, 어쩌다 한 번 쓰여졌겠는가. 김훈의 글을 읽으면 통찰력을 가진 강력한 문장을 여러번 만날 수 있다. ‘자전거 여행’은 숨이 턱 막히는 첫문장이 많다. 느낌으로는 모든 꼭지마다 첫문장에서 잠깐 쉬어야 했다.



‘남해안 경작지’에 나오는 첫문장이다.


봄의 흙은 헐겁다.

자전거 여행, 김훈



이런 문장은 아무나, 아니 누구도 쓸 수 없다. 김훈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일곱 글자의 문장을 읽자마다 압도당했다. 김훈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부풀어오른 땅을 발로 꾹꾹 눌러보았을 것이다. 곧이어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밭을 눌러보았으리라. 밭을 가는 농부에게 봄날 부풀어오른 흙에 대해 말을 붙였을 것이다. 봄이 오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어보자.


봄의 흙은 헐겁다. 언 땅이 녹고 햇볕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흙의 관능은 노곤하게 풀리면서 열린다. 봄에 땅이 녹아서 부푸는 과정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행복하다.
땅 위의 눈을 녹인 초봄의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이 물기는 다시 언다. 이때 얼음은 겨울처럼 꽝꽝 얼어붙지 않고, 가볍게 언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어 구멍마다 얼음은 녹는다. 물기는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을 조금씩 넓혀간다. 넓어진 구멍들을 통해 햇볕은 조금 더 깊이 흙 속으로 스민다. 그렇게 해서,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오른다.

자전거 여행,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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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을 꼽으라 하면 나는 7세기 신라 여승 설요의 문장을 잡아들 것이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瑤草芳兮思芬蘊(요초방혜사분온) 將奈何兮是靑春(장내하혜시청춘)


설요는 신라장군의 딸이었으나 아버지의 죽자 15살에 출가했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꺼나'라는 시를 쓰고 21살에 파계했다. 설요는 속세에 내려와 시쓰는 남자의 첩이 되어 당나라를 떠돌다 객사했다. 파계승의 운명도 예감했으리라. 젊음의 설레임도 컷겠지만, 젊음이 이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꽃들은 해마다 피고 지겠지만, 우리네 청춘과 우리네 삶은 덧없이 사라져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설요는 청춘에 충실했고, 삶을 받아들였다. 떠돌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삶을 후회하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설요의 문장을 읽을 때면 두보 '곡강'이 떠오른다.


꽃잎하나 지면 봄이 그만큼 사위어가거늘, 바람에 펄펄 꽃잎이 날리니 이를 어찌하랴

두보 '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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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탈 때 가만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의 허벅지가 어떻게 땅을 뒤로 밀어내고 있을까. 멀리서 볼 땐 분명히 구부러진 길이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길은 왜 펴져보일까. 우리는 구부러진 길을 갈수나 있긴 한건가. 김훈은 과학의 합리성이 아닌 감각과 기억으로 글을 쓴다. 김훈은 책 머리에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라고 썼다.



나는 진경산수화를 좋아한다. 돌아와서 그리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것을 인상적으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상을 그리기에 인간의 오감은 얼마나 모자란가. 김훈은 인상을 그려낸다. 나는 인간이므로 과학을 이해할 수는 있을지언정 감각할 수 없다. 그래서 김훈의 글을 좋아한다.



바퀴가 길을 밀면 길이 바퀴를 밀고, 바퀴를 미는 길의 힘이 허벅지에 감긴다. 몸속의 길과 세상의 길이 이어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간다. 길은 멀거나 가깝지 않고 다만 뻗어 있었는데, 기진한 몸속의 오지에서 새 힘은 돋았다. 지나간 힘은 거둘 수 없고 닥쳐올 힘은 경험되지 않는데 지쳐서 주저앉은 허벅지에 새 힘은 가득하다. 기진한 힘 속에서 새 힘의 싹이 돋아나오고, 나는 그 비밀을 누릴 수 있지만 설명할 수 없다.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길이 아까워서 천천히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좋아서 빨리 가게 된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들은 산의 가파른 위엄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길들은 산허리의 가장 유순한 자리들을 골라서 이러저리 굽이치는데, 이 길들은 어떠한 산봉우리도 마주 넘지 않고 어떠한 산꼭대기에도 오르지 않으면서도 고갯마루에 이르러 마침내 모든 산봉우리들을 눈 아래 둔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겨우, 그러나 기어코 봄은 온다. 봄은 이 산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 산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봄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다만 지금은 겨울일 뿐이다.

자전거 여행, 김훈


물리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몰가치하다. 물리적 자연이 그 안에 윤리적 가치를 내포한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것은 영원한 인과법칙의 적용을 받는 자연과학의 자리일 뿐이다. 이 무정한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고 시간을 쇄신시켜주는 것은 삶의 신비다.

자전거 여행,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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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마상청앵도', 이인문 '단발령망금강'



‘자전거 여행’에는 소설 ‘남한산성’의 모티브도 있고, ‘칼의 노래’의 모티브도 있고, ‘흑산’의 모티브도 있다. 장편소설이 된 작은 모티브를 읽는 기쁨이 있다. 모티브마다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와 한계를 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소설과 연극은 사건과 인물로 꾸려져 있다. 삶의 대부분은 사건이 아닌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삶은 소설이나 연극이 아니다. 김훈은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고 썼다. 일상에서 사건이 나올 순 있어도 사건이 일상이 될 수는 없다. 밥과 사랑이 사건과 인물보다 먼저라는 걸 알겠다.



김훈은 한국일보 기자였다. 그는 유신시절 기자가 되었다. 군사정권에서 '삼청교육대'를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고 했다. 삶은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걸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청년들이 얻어맞고 구치소에 갇혀 있어도 그런 기사는 쓸 수 없었다고 했다. 기자 김훈은 동물원에 갔다고 했다. 호랑이가 새끼를 낳고, 낙타가 교미를 한 것을 쓰며 돈과 밥을 얻었다고 했다.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삶이 불가능할 때, 영광보다도 치욕을 내포하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치욕은 삶의 일부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삶이든, 역사든, 오로지 온전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남한산성을 가르쳐준다.

자전거 여행, 김훈


https://youtu.be/bfn2KXN69Wk



이승훈과 정약용은 서슴없이 배교했고, 서로를 밀고했다. 그들의 밀고로 많은 교인들이 잡히고, 죽었다. 인간의 믿음과 신념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정약용은 죽을 때까지 형틀의 순간을, 배교의 순간을, 밀고의 순간에 대해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삶이란 무거운 것이다.


환란은 닥쳐왔다. 형틀에 묶인 정다산은 천주교를 서슴없이 배반했다. 그의 배교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존재를 폭로했고, 황사영과 이승훈을 삿된 무리들이라고 저주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 숨어 있는 천주교인들을 색출할 수 있는 방법을 취조관들에게 일러주었고 이 방법은 실제로 포도청에 시달되어 천주교도 검거와 심문에 활용되었다.
이승훈도 형틀에 묶였다. 이승훈은 정다산의 행적을 폭로했고, 정다산을 저주했다. 이승훈은 자신이 정다산에게 영세를 준 사실까지도 폭로했고, 정약전을 밀고해서 사건에 연루시켰다. 형틀에 묶인 처남과 매부는 그렇게 서로를 저주하고 밀고하여 울부짖었다.
1801년의 국청 마당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다산이 사형을 모면하게 되는 배경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적극적인 배교가 큰 힘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길고도 기약 없는 유배생활에서 수많은 저술을 쌓아가면서도 그는 1801년의 배반과 치욕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쓰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 다산의 치욕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그가 한평생 간직했던 침묵이다. 치욕은 생애의 중요한 부분이고, 침묵은 역사의 일부이다.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 대한 달레의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처럼 무자비하다. 그는 이벽,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등을 모두 배교자로 규정했고 그들의 죽음을 순교에서 제외시켰다. 그들의 죽음에는 순교와 배교가 겹쳐있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 두렵기보다도, 순교와 배교, 순결과 치욕이 겹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더욱 두렵다.

자전거 여행, 김훈

ETzLqx8U8AEykAp.jpg?type=w1600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대한 이야기를 김훈 작가가 소설로 써냈다.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 많은 순간들을 만난다. 순간들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익숙한 단어들도 자주 나온다. 단어의 참뜻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순간을 감각할 뿐이다. 생각하지 않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다. 나는 과거의 순간도 지금 생각을 불어넣으면 존재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고정되어 있는 미래를 향해 살아나가는 것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종종 글을 써본다.



'자전거 여행'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이 짧은 글로 써 내진 못했을 것이다. 출간된지 10년이 된 책이지만, '자건거 여행'은김훈의 절정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누구라도 읽는 순간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산다. 나의 인생책 이야기이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모두 자신의 인생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인생책이 있다면 지금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나는 이번에 '자전거 여행'을 다시 읽었다. 좋은 책은 바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전거여행에 삽입된 사진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글로 보여주기 어려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본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절로 여러 생각을 한다. 사진작가는 이강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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