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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May 21. 2024

생은 느끼는 것感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觀이다.

(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2/3)

https://blog.naver.com/pyowa/223450434161


미야모토 테루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은 유명하다. 테루는 비를 피하려고 서점에 들렀다 문예지에 있는 단편을 읽게 됐다. 이보다는 잘 쓸 수 있겠다며 전업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패기가 느껴지는 호쾌한 일화다. 


거짓은 아니지만 배경이 생략되었다. 테루는 당시 공황장애가 있었다. 전철을 타기 어려웠다. 출퇴근이 너무 힘들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병이 없는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느 순간 스스로 미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무서웠다. 당시 분위기상 정신과에 다닐 수도 없었다. 회사를 오래 다닐 순 없었고,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했다. 비오는 날 서점에 들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가능성이 있는 건 글쓰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테루는 생계가 막막해 철물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물론 전업 2년만에 '다자이오사무'상을 수상했다. 


30대 초반 중증 폐결핵을 앓았다. 당시 중증 폐결핵 병동에서 죽음은 일상이었다. 일상이 없는 병동생활 동안 미야모토 테루는 죽음과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지냈다. 그것밖에 달리 할 게 없었다. 


미야모토 테루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말을 인용하며 '생의 힘에는 우연을 곧 내적 필연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갖춰져 있는 법이다. 이 사상은 종교적이다. 그러나 공상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의지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니 거기에 '운명'이나 '필연'을 넣는다. 모두 그렇게 느낄텐데,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인생에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내 인생의 모두를 운명이 관여하진 못하더라도 절반쯤 아님 절반의 절반쯤은 관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은 느끼는 것感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觀이다.

(미야모토 테루)



미야모토 테루는 '쓰지 않으면 사라져 간다. 그런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고 썼다. 죽음이 언제 닥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루는 초조했을 것이다. 테루는 생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感(느낌)에는 주체가 있지만 주체의 의지가 없다. 觀(바라보는 것)에는 주체의 의지가 있다. 바라보는 것에는 주체의 관심사, 생각, 삶이 버무려져 있다. 시선의 각도와 농도가 있다. 그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그 순간에서야 비로서 발굴된다. 


그러니 바라보지 않으면 그 시간은 사라져간다. 글을 쓸때에야 더 깊이 바라보게 되고 그것이 관觀이 된다. 그러니 시선이 없다면  글이 아니다. 느끼기만 해서는, 느낌을 옮기기만 해서는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되기 쉽다. 


쓰지 않으면 바라보지 않게되고, 바라보지 않게되면 삶의 덩어리가 발굴되지 못한 채 사라져가게 된다. 그런 생각이 우리를 초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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