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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May 28. 2024

'기합'과 '내무부조리'를 없앴던 얄팍한 방법

https://blog.naver.com/pyowa/223460976145



어렸을 적 '얼차려'라는 말은 없었거나, 쓰지 않는 말이었다. 그때 쓰던 말은 '기합'이었다. 기합을 주고, 기합을 받았다. '기합을 없애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군의 실무자들은 고민에 빠졌고 결국 대안을 찾아냈다. '불법적인 기합'과 '적법한 얼차려'가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기합'을 '얼차려'로 바꾸었다. '기합을 없애라'는 명령은 즉시 이행되었다. '기합'이란 단어가 사라지자, '규정에 위반한 얼차려'와 '규정에 따른 얼차려'만 남게 되었다. 


이제 없애야 할 것은 '내무부조리'였다. 구타 및 가혹행위는 내무반에서 일어났고, 잡고 잡아도, 벌하고 벌해도 내무부조리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그러자 '내무부조리를 없애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실무자들은 다시 고민했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기합'처럼 하면 되는 것이다. 


'내무반'을 '생활관'으로 변경하였다. '내무부조리'는 그 순간 사라졌다. '내무 부조리를 없애라'는 명령은 완벽히 이행되었다.


이후에는 '얼차려'란 말만 살아남았다. '영창'이 사라지면서 사라져가던 '군기교육'이란 말이 부활했다. 그런데도 위법한 얼차려와 군기교육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끝없이 강조공문이 내려가도 가슴아픈 소식은 들려온다. 규정에 위반한 얼차려는 언제쯤 사라질까.


보통의 조직은 당근으로 조직원을 관리한다. 채찍은 보여주기만 할뿐 사용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최후에야 채찍을 고민한다.


학생과 병사의 공통점은 승진과 보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학생은 평가라도 시스템이 있지만, 병사는 평가에서도 자유롭다. 지휘관이 병사에게 줄 수 있는 당근은 없다. 겨우 휴가가 있을 것인데, 복무기간이 짧아질수록 휴가로 통제하기는 어렵다. 군기강을 강화하라는 공문은 쉼없이 내려온다. 엄중문책할 것이라는 엄포도 함께 하달된다. 지휘관은 군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적법과 위법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다 적법의 경계선을 한참 넘게 되고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사고가 발생하면 지휘관의 모든 행동과 생활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어 엄중문책하게 된다. 지휘관은 위축되고, 안전위주로 부대를 관리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군기강을 강화하라'는 공문이 하달된다. 무한루프다.


'기합'과 '내무부조리'를 없앴던 것같은, 얄팍한 수가 더 남아 있을까. 이제는 없을 것 같다. 언제쯤 불법적인 것들이 사라질 것인가. 지휘관이 당근으로 부대를 지휘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여러 당근을 고안해 낼 수 있겠지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당근의 종착점은 결국 모병제라고 생각된다.


© niloytesl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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