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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는이가 Mar 15. 2023

시실리

우리 영감의 발생지 그곳.

고백하자면 딱 한 번 시실리에 계신 영감님을 뵈러 간 적이 있다.

영감님을 정면에서 마주한다거나 조언을 구하겠다던가 아는 사이가 되려는 그런 의도는 없었다.

거길 왜 갔는지는 그때도 7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다.


이유도 모르고 마음이 끌려 찾아간 시실리.

시실리에 있는 영감님 댁은 골목 끝에 자리했고 우리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돌렸었지.

'사진 속의 그 집이 여기구나' 딱 그 정도만 보고 지나치려 했는데 마침 영감님이 누군가와 대문 밖으로 나오셨다. 손님으로 추정되는 분과 아쉬운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영감님은 우리를 발견하시고는 한참 수상한 눈빛을 보내시더니 '너도 그 놈이구나'하며 시선을 거두고 대문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셨다.

영감님은 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몸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반면 차 안에서 숨 죽인 채 웅크리고 있던 우리는 노을빛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으니 눈동자 움직임까지 잘 보였으리라.


그 당시 남편과 나는 집 지을 땅을 찾아 헤매던 시기였고 그날도 해남 일대를 돌다가 희망만 싹둑싹둑 잘라내고 맥없이 돌아서던 참이었다. 돌아서는 길목에 시실리가 있었겠고 길고 긴 땅 찾기 게임에 가능성이라던가 끝이라던가 뭔가가 있긴 한 건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혹은 존재 자체로 힘을 얻고 싶었던 걸지도.


'길 잃은 자여, 남쪽으로 오라.'

어느 노인의 행적을 선구자의 부름으로 여긴 우리, 독일에서 한반도의 남쪽으로 날아와 남편은 버섯농장에서 일하고 나는 집 지을 땅 매물서치에 매달렸던 날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땅을 사게 되었고 오랜 시간 집을 짓고 밥벌이하느라 시실리 영감님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어찌어찌 남편이 지은 집에 입주하고 우리는 각자에 맞는 직업도 찾으면서 더욱 바빠졌다. 그렇게 해서 벌은 돈으로 정원을 꾸밀 여유가 생기니 그때서야 시실리가 궁금해지더라.


핸드폰을 열어 '시실리'라고 검색해 보았다.

영감님의 블로그는 여전히 운영 중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신 장소는 독일이었고 글은 가끔 올라왔다. 우리와 나이가 비슷한 딸이 독일에 살고 있다는 건 블로그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집도 따로 마련하고 냉장고와 싱크대도 들이는 걸 보니 단순한 여행이 아닌 분위기였다. 블로그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해남에 있는 집은 정리됐고 반려동물들도 입양 보내졌다. 물음표가 그려졌지만 눈에 보이는 건 사모님과 독일을 즐기는 모습이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얼마 전 내 책<난생처음 시골살이>가 나왔을 때 다시 한번 시실리 영감님이 생각났다. 때마다 생각나는 걸 보면 영감님이 우리에게 보통 영감을 주신 게 아니었나 보다.


아...... 그런데 이번엔 전과 다르게 쓸쓸한 분위기였다.

병원에서 방문하여 휠체어나 환자용 침대를 수거하고 있었다.

사모님은 그간 투병 중이셨던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모님의 치료를 위해 독일에 가셨던 거였다.

이제 혼자가 된 영감님은 다시 귀국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한국에 가면 소설 쓰실 거라며 등장인물 이름을 공모하시기도 했다. 잘은 모르지만 영감님은 기자라던가 연재작가라던가 글과 관련된 직종에 계셨던 것 같다. 영감님의 글은 찰지고 상상력은 위트가 넘쳐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귀국하시면 슬플 새 없이 바쁘고 창작의 고통으로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영감님도 우리도 다시 갈리 없는.

아니, 애초 있지도 않았던 시실리(時失里)를 떠올리면 아이러니하다가 잠시 멍해진다.

오늘처럼 바람에 온기 가득한 날은 지중해 남쪽 섬 시실리(sicily)를 상상해본다.

이제 진짜 봄이다.



*시실리(時失里):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시실리(sicily): 이탈리아 남쪽의 섬, 시칠리아의 영어 이름.



해남에 사는 70대 노부부, 시실리 영감님께 애도와 감사를 전하며...

은는이가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길, 누군가의 주격조사&보조사가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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