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탐구의 끝은 언제일까
늘 완벽한 결과물을 완벽한 포장지로 감싸내어 세상에 드러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기대치가 항상 높았고 그걸 꼭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온전한 결과물로 내어놓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오며 경험한 분야가 꽤 다채로운 편이지만 용기가 부족한 탓인지 그런 경험을 세상에 꺼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나긴 시간들을 보내며 나와 비슷한 경험인데도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인생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보고 느끼며 늦게나마 스스로에 대해 변화해야 한다는 채찍질을 가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그 문구가 나를 계속 찌른다.
발령 첫 해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직접 담임으로 아이들의 삶에서 함께 호흡하는 내 삶이 생각보다 나와 잘 맞다는 생각을 했다. 옆자리 부장님께서 "삐약이 쌤은 좀 어때? 교직이 할 만 한 것 같아?"라고 물어보셨을 때 "예전에는 안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해 보니까 생각보다 너무 잘 맞고 재밌어요. 잘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망설임 없이 선뜻 대답을 내어놓았었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손발이 묶인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이 직업과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했던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교직을 그만두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들었던 것은 작년이었다. 각종 악성 민원 및 특이한 학생과 보호자들로 몸살을 앓았어서 그런지 그 여파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다.
학교급도 바뀌어 한층 더 성숙해진 고등학생 아이들을 끌어안고 품어주는 담임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아이들이 내 교직생활 중 가장 예뻐하고 애정을 많이 줬던 아이들인데도 불구하고, 올 해 다시 커서 만난 아이들을 향한 다정한 마음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보호자들의 날선 말들에 다친 마음을 여물게 하려고 여러 면으로 노력했는데,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은 겁이 나서 그랬다. 또 공격을 받아 내 책상의 전화기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히고 손이 떨리는 상황을 마주할까봐 더 그랬던 것만 같다.
우리 교무실에는 사랑 많은 선생님들이 많다. 어쩜 저렇게 다정하고 세심할까 신기할 정도로. 올 해가 첫발령인 새내기 교사로 애정을 담뿍 담아 일상의 짜투리 시간을 아이들과의 소통으로 꽉꽉 채우는 선생님. 간식 하나도 허투루 나누어 주지 않고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 직접 띠지와 표지를 제작해서 선물하는 선생님. 서른 명이 훌쩍 넘고도 남는 아이들 이름으로 손수 삼행시를 지어 하나 하나 인쇄해서 다정한 간식을 건네주는 선생님.
우리 교무실의 사랑 많은 선생님들과 나를 비교하며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어쩌면 회피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느새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나도 한 때는 그런 때가 있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렇게 애써서 해줘봤자 고마운 줄 모르더라는 마음과 그래도 아이들은 그 마음을 안다고 다 기억한다고 하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을 품은 채.
좋은 마음으로 했던 많은 활동과 세심한 일들이 예기치 못한 반응이 되어 화살로 돌아오고, 그에 데일 만큼 데여서 체념한 선생님도 물론 있다. 어쩌다보니 학생부만 담당하게 되어 업무가 너무나도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학교만 오면 힘이 나고 아이들만 보면 기운이 솟아서 나는 이러나저러나 학교가 천직이라는 선생님도 있다.
다양한 경력과 다양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선생님들을 옆에서 보며 공감하기도 하며 감탄하기도 하며 그렇게 일 년 가까이가 흘러가고 있다. 유난히 조용한 성향의 아이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올 해의 우리반은 정말 너무나도 조용하다. 코로나 시기의 아이들은 학교를 못 나와서 데면데면해서 그렇다 쳐도 올 해의 우리반은 정말 무슨 잠가루를 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침조회 때는 적막이 흐른다. 졸려서 그런거니, 아니면 아직도 내가 어색해서 그런거니..? 만능 MBTI론은 선호하지 않는 나지만 이쯤에서 나도 한번 MBTI 이야기를 슬쩍 꺼내봐야겠다. 다른 과목 선생님이 우리반 MBTI를 조사해보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I가 70퍼센트를 훌쩍 넘었다. 이를 어쩌나. 나도 E에서 I로 변해버린 담임인데..!
지난 아침, 문득 아이들에게 고백은 해야겠다 싶어서 어렵사리 입을 뗐다. "얘들아, 사실 선생님.. 작년 한 해가 너무 힘들었어서 선생님 일을 그만둬야하나 진심으로 고민했었어. 그래서 올 해 담임도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지원하지 않았었어. 물론 사정상 이렇게 되긴 해버렸지만. 시간이 좀 흘러서 선생님 마음도 괜찮아 진 줄 알았는데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가봐. 원래같으면 더 잘 챙겨줘야 하는데 너희를 예전 애들처럼 잘 못 챙겨주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역시나 조용한 우리반답게(?) 괜찮아요~라는 쿨 한 대답을 한 한 명ㅡ비록 내 추측이긴 하지만ㅡ을 제외하고는 또다시 적막만이 감도는 공기를 선물했고 괜히 더 민망한 마음을 안고 평소보다도 더 어색하고 민망하게 교실에서 빠져나왔다.
이렇게 여전히 교직을 계속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과 한 편으로는 아끼던 아이들의 애정과 소중한 말에 다시 한번 그만두지 않고 계속할 힘을 얻기도 하고. 마음의 추가 저울질을 멈추지 않는 한 해였다. 직업을 그만두자니 그동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리고 이 직업에 대한 애정으로 공들인 수많은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포장하지 말고 더 솔직한 마음을 풀어보라고? 그렇다. 그만두자니 당장 끊길 급여에 달라질 내 삶? 만만찮게 두렵다. 나는 열심히 사는 1인 가구의 가장이기도 하니까!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싶은지를 찾는 고민을 지속하던 몇 달이었다. 해마다 급격한 변화가 많던 20대를 살아내다가 갑자기 찾아온 안정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다가 다시 이렇게 또 고민을 한다. 친구들 사이에선 내가 진로 고민과 도전의 대명사로 통했는데. 언제까지 과거에만 매여있을 수는 없단 마음으로 여기에서도 다양한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현재 내가 서 있는 자리는 교사란 자리니까. 불안이 모는 배 위에서 요동치더라도 끌려가지 않으며 묵묵히 버텨내는 시간의 힘을 믿으며. 그렇게 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