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말 없이 떠나 연락 없고!"
음악소리에 침대에서 뒤척이던 아린이 눈을 번쩍 떴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정리하고 이불을 걷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열어 보는 그 순간 마이크를 든 한 남성이 보였다.
"저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지나 칠 수 있는 사람, 모임에서 눈에 띄지 않는 구성원, 지각을 해도 시선을 받지 못하는 학생, 여러분 누구나 그런 사람일 때가 있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여전히요. 그때 그 사람을 알아봐 주는 눈이 바로 제가 가진 특별한 눈입니다.
저는 이 눈으로 여러분의 기쁜 일을 알아보고 그 기쁨이 두 배가 되도록 봉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슬픈 일을 알아보고 그 슬픔이 반으로 작아지게 곁에서 힘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제가 먼저 손을 내밀고 말하겠습니다."
준아가 연설을 멈추고 계단에서 내려와 학생들 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준아가 다가오자 수줍게 고개를 숙인 남학생 앞에 멈춰 섰다.
"저기,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안녕하세요. IT대학 강준아입니다. 괜찮으시면 저기까지 걸어가면서 얘기 나눌까요."
남학생은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부담스럽지는 않았는지 살짝 웃어 보였다.
준아는 다시 오른쪽 편에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시간이 되시면 차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다 의견이 맞았는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준아는 두 사람에게 목을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다시 전체를 향해 몸을 돌려 말을 이었다.
"네, 제 눈은 학생 대표라고 해서 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동등한 눈높이에 있습니다.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싶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준아의 연설을 가로막으려는 듯이 외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본관 정문에서 세 명의 남자가 나왔다. 그중 큰 소리를 친 것은 가장 왼쪽에 있는 기획처장이었다. 그중 한 명은 가운데에 서 있는 네이비 정장 차림의 남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경계하는 모습이다. 준아는 그를 어디서 본 적이 있나 했더니 지난주 본관 안에서 철문 앞을 지키던 힘이 센 경호원이었다. 그의 보호를 받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는 자는 바로 윤지혁 교수였다.
"아,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1분만! 1분이면 됩니다."
태오가 급히 기획처장 앞으로 뛰어가 사정을 했다.
"무슨 1분이야, 당장 해산해. 안 그러면 사람 부를 테니까!"
"아니 학생이 학교에서 학생들 모아 놓고 말도 못 하나요?"
순간 철문 지킴이가 한껏 무게를 잡으며 태오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몰려있는 학생들은 갑자기 세 사람이 등장하고 연설이 중단되자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두운 분위기를 직감했는지 한두 명씩 손목시계를 들어 보이며 강의시간을 핑계 삼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준아는 떠나는 학생들을 보며 마음이 조급해져 마이크를 다시 입 가까이 대었다. 그러다 태오 쪽을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말하려다 망설였다.
'수많은 학생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경호원이 폭력을 행사하기 어렵겠지만 붙잡고 끌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거야. 저 사람 보다 키가 작고 왜소한 태오가 큰 덩치의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겠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인가..'
"강준아!"
준아는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나는 곳은 한참 윗 쪽이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였다.
"강준아!"
N극이 S극에 끌리듯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느 한 여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준아 선배! 계속하세요. 끝까지 듣고 싶어요!"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아린의 모습에 모든 구경꾼들의 눈은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간 거지?- 수군대는 사람들 틈에서 다른 누군가가 또 외치기 시작했다.
"계속하세요. 더 듣고 싶어요!"
"마저 하세요!"
"그래요! 끝까지 들어 봅시다!"
학생들이 하나 둘 주는 응원의 메시지가 준아에게 용기를 주었다.
스피커를 통해 중저음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았습니다."
기획처장은 화가 난 듯 무전기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 말로는 안 되겠네. 바로 다 몰아내겠습니다."
지혁은 기획처장 쪽으로 오른손을 들어 그의 다음 행동을 제지하였다. 두 눈은 아린이 보이는 창문에 고정된 채였다.
"1분이라 잖아요! 1분! 그만 갑시다!"
그러고는 앞장서 걸어갔다. 그 뒤를 경호원과 기획처장이 따랐다. 그 뒤로 준아의 남은 멘트가 이어졌다.
"혼자라는.. 외로움까지 알아보는 눈, 이 특별한 눈으로 숨어 있는 소수까지 알아보고
모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여러분과 함께 학생이 주인인 IT대학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앞 쪽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와와- 함성을 쳤고 모든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준아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박수소리와 함께 어느새 사람들은 오백여명 가까이 늘어 있었다.
준아는 환호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내려오며 가장 먼저 본관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아린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윤아린, 고맙다!'
준아에게 다가오는 태오는 감동받은 것처럼 왼손을 가슴에 얹고 말했다.
"마지막 인사는 면했네. 아주 잘했어. 하하."
"고맙다! 다 네 덕분이지!"
준아는 태오의 어깨를 잡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나야 머 한 게 춤 밖에 더 있냐. 근데 넌 언제 그렇게 안무를 연습했대. 이거 내숭이구만."
"말도 마라. 너 따라 하느라 힘들어 죽을 뻔, 속도가 자칫 하면 망할 뻔.."
"그 짧은 시간에? 마음 공감만 아니라 몸도 캐치 잘하는구먼.."
"댄스 머신 친구 둔 덕이지. 서당 개 삼년이면.. 아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연설이 잘 끝나고 학생들이 흩어지자 지켜보고 있던 지연과 재훈도 반갑게 달려왔다.
"얘들아, 난 정말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재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둘을 안으려고 하자 지연이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아- 징그러워! 남자끼리 안기는. 보는 눈이 있으니깐 적당히 하고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덕분에 첫 단추를 잘 꿴 거 같아. 모두 고마워!!"
준아는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얻었다.
찰칵- 찰칵-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캐치하는 자가 있었다. 한영대학보 정치부 기자인 사회대학 소속 유진아였다. 그녀가 찍은 사진들 속에는 준아의 옆모습이 재훈과 지연을 향해 웃고 있었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헤드 라인 감이야.' 찍힌 사진들을 넘겨가며 놓친 장면은 없는지 확인했다. 카메라 속에는 준아와 태오가 춤을 추는 장면부터 준아가 연설하는 모습, 태오가 기획처장과 말을 주고받는 모습까지도 담겨 있었다.
그중 멀리 실루엣처럼 찍힌 사진이 있었다. 확대를 해 보니 본관 꼭대기 층 창문에서 두 손을 모아 '강준아'를 외치고 있는 레몬 컬러의 홈웨어 원피스 차림의 여학생, 윤아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