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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Oct 21. 2023

알면서도 하지 않을 여유

기업 입사 전형의 최종 면접이 임원·실무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보는 방식이었다.(합숙과 등산 전형이 있는 기업도 있다.) 특이한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여러 어른들, 특히 부장급 이상 현직 또는 임원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혹시 술을 권할 경우 주량을 줄여서 밝히고 절대 취하지 마라.”, “음식 소리 내서 먹지 말아라.”, “어른이 숟가락을 들고나서 먹기 시작하는 게 예의다.” 등의 식사예절을 들었다. 가장 유용한 팁은 내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앞에 놓인 반찬만 먹어. 저 멀리 있는 반찬에 손을 쭉 뻗거나 몸을 일으켜서 먹으면 욕심이 많아 보이니까.

이 조언에 옆에 있던 다른 어른들도 '그래, 맞지.' 하며 맞장구를 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아니 그럼 내가 좋아하는 콩자반이 저 멀리 한 접시 있는데 콩 몇 개 좀 손 뻗어 먹는다고 욕심쟁이 되나.'라는 반발심이 들었다. 헌데 생각해 보니 정말 유용한 팁이었다. 굳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평가하는 자리인 만큼 작은 행동도 나의 성향을 판단하는 근거가 됐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무의식 중에 나오는 행동을 보고 지원자들을 머릿속으로 분류해 합격과 탈락을 결정하려고 만든 면접이었으리라.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의 의도 없는 행동을 보고 나만의 잣대로 재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번 화를 참다 한 번 화를 터뜨리는 순간을 보고 '저 사람은 흥분을 잘하는구나.'라고 판단해 버릴 때가 있다. 두통이 와서 찡그린 건데 상대방이 내 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미세한 표정 변화를 캐치해 간파한 양 단정 짓는다. 다른 사람들의 일부를 보고 마음대로 분류해 버리는 게 일상이다.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며 괜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 스스로가 부자연스러운 순간이 꽤나 많아진다.


면접 후 나는 어른과 식사를 할 때면 가까이의 반찬만 먹게 됐었다. 물론 식사 면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조언이었음을 알고, 손을 쭉 뻗어 음식을 집어먹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복스럽게 잘 먹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구태여 편견의 조각을 심을 행동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한 번 오해하면 그건 영원히 풀릴 기회가 없거나, 편견이 걷힌 그의 진짜 모습을 보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걸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먹고 싶은 반찬이 멀리 있다면 쭉 손을 뻗거나 앞사람에게 반찬 접시를 건네달라고 가볍게 부탁한다.


관심법은 궁예만 썼던 게 아니다. '저 사람 웃는 모습이 왜 저렇게 부자연스럽지. 뭐 숨기는 거 있나 보다.', '김대리님 또 명품 신발 신었네. 부모님이 부자인가 봐.',  '눈웃음 살살 치는데 여우짓 꽤나 하겠네.' 오늘도 잠시 마주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내 머릿속 편견의 상자로 들어간다. 평생을 알아도 모르는 게 사람이지만 어찌하겠는가. 거친 사회에서 간단하고 편하게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 이뿐인 것을. 초단위로 들어오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판단하는 필터는 모두가 가졌지만, 사회 통념상 변하는 기준들도 있다.


4년 전에 같은 주제로 글을 썼을 때는 여전히 욕심 많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꺼려 내 앞의 반찬만 먹는 나였다. 하지만 그동안 일하며 팀을 이끌어 보는 경험도 하면서 사회 통념을 알지만 겉치레 예의보다 내 감정을 우선하는 법을 후배들에게 배웠다. 채용이나 계약을 따내는 일 등 갑에게 전권이 있는 상황이라면 물론 내 역량이 눈에 거슬리는 행동에 가리면 안 되고, 지금도 여전히 기업의 임원진은 60대가 대부분이라 의사결정권자와의 식사자리 예절은 크게 바뀐 건 없다.  


생각해 보면 아주 작은 순간에 사람에 대한 호오를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인가 회사 점심시간다같이 밥을 먹으러 가면 자리에 앉자마자 막내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찹찹 휴지를 깔고,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휴지 위에 올린 후 물컵에 물까지 따라 세팅 완료하는 기본값이 됐다. 하면 '센스 있는 막내'로 가점을 쌓는 정도. 막내가 하지 않는다면 잠시 눈치를 보다 수저통 근처에 앉은 사람이 주섬주섬 수저를 놓겠지만 "사람 싹싹하고 괜찮다."는 선배들의 평가는 의외로 이런 작은 순간들에서 이루어진다.


다만 이런 작은 순간을 활용할지 말지는 온전히 내 선택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좋게 생각하는 행동과 불쾌하게 생각하는 행동의 경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상대에 따라 때로는 배려를 담은 작은 행동을 더하고, 때로는 나의 존엄을 위해 알면서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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