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낼 수밖에.
안녕하세요. 플러수렴입니다.
친구와 통화를 했습니다.
해외 대학원에 합격한 친구가, 전공과 학교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마지막 고민을 하는 중인데
저와 이야기하면 생각이 정리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누군가가 고민이 있을 때 저를 떠올려준다는 건,
참 고맙고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고, 우리가 함께 도달한 결론은 이랬습니다.
“지금 더 끌리는 전공을 택하자.
선택의 기준은 장학금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전공을 가든 힘든 순간은 분명 찾아올 텐데,
그때 그 힘듦을 넘겨낼 동력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확신일 때,
더 오래 버틸 수 있고,
또 동력이 다해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지금 더 끌리는 쪽을 택하는 게 맞지 않을까?”
친구는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마음속엔 이미 답이 있었지만, 누군가의 입을 통해 확신을 얻고 싶었나 봅니다.
친구가 잘 해내길. 그리고 너무 힘들지 않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지난 대학원 생활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과거의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솔직히 말하면 동력을 잃었던 순간은 정말 많았어요.
돌이켜보면, 이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라기보다는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기치 못한 순간마다 멍해지고,
내가 왜 이 길을 택했는지 되묻게 되는 날들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부족한 나를 마주하면서,
저는 ‘적성’보다 ‘노력’을 더 믿던 스스로의 태도를 서서히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적성이란 건 분명히 존재하고,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거든요.
그리고 그 '노력'이라는 것도,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의 환경과 여건, 타이밍이 맞물려야 비로소 '노력'이 온전히 작동하니까요.
노력의 방향과 대상을 '나와 잘 맞게' 선택하는 것 역시,
그 노력의 일부이자 어쩌면 운의 일부이기도 하고요.
그동안 ‘내가 잘해왔다’고 믿었던 일들도,
사실은 평균 정도의 실력에 팔할쯤 되는 운이 더해진 결과였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나의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라는 믿음은
꽤 오만했던 것 같아요.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세상과 나를 제대로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겠죠.
하지만 마음이, 그리고 자신감이 무너진 날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맞아요. 자존감에 큰 타격을 입었고, 아직 그 회복을 기도 중입니다.
그 회복을 위해,
던지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여전히 논문 작업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는 거겠죠.
친구는
제가 대학원에서 어떤 감정을 겪었는지 듣고 싶어했습니다.
"만약 내 옆에 신랑이 없었고 나 혼자였다면, 지금 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지난 시간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부족함을 매일같이 느꼈습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이질감.
이상은 늘 높았는데, 현실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을 때의 좌절감.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생각해보면 그 감정들은 다 제가 만든 감옥 같기도 해요.
남과 비교한 것도,
스스로에게 과한 목표를 세운 것도,
해내지 못한 부족한 실력도,
그리고 그런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마음까지.
모두 저 자신에게서 비롯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저를, 누구보다 제가 더 몰아세우고 있었던 거죠.
“만약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통화가 끝나고, 이 표현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그게 대학원 때문이라면, 정말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주변에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고작 학위 하나 때문에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하지만 동시에, 학위 과정에서,
‘다시 태어나야 하나’ 싶을 만큼 버거운 순간들이 정말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서 문득 생각해봤어요.
정말 내가 세상에 없다면,
나는 세상에 어떤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나고 싶을까?
내 묘비에는 어떤 문구가 새겨지길 바랄까?
저는 제 묘비명으로 이렇게 적고 싶습니다.
“결국 해냈던 사람.”
이 말은, 지금의 저를 버티게 하는 힘 중 하나예요.
저는 세상을 스스로 떠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해내기 전'이니까요.
그리고 이 문장을 묘비명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한,
오늘도 저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을 다 쓰고 나니, 왜 눈물이 나는 걸까요.
늦은 밤, 키보드를 두드리며 울고 있는 제 모습이 스스로도 조금 웃깁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어요.
‘결국 해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저를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는 것.
이 말을 내 묘비명으로 삼기로 결심한 이상,
내 죽음의 원인은 사고사 아니면 병사겠구나.
그 전까지는, 계속 살아내야 하니까요.
해내고 싶은 목표는
살아가며 계속 더 생겨날 테니까요.
지금도 학위 외에 해내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이 한 줄을 품고 살아갈 거예요.
“결국 해냈던 사람.”
그 말은,
지금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내가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니까요.
아직 해내지 않았기에,
저는 여기에 있고,
오늘도 계속 살아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