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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Jun 26. 2024

아이들 사교육에 소극적인 이유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변호사 엄마

경기도 신도시에 살면서 초등학교 3학년, 1학년 남매를 키우고 있다.

사교육을 일절 안 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돌봐주셨을 때는 나이 드신 부모님의 양육 부담을 덜기 위해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켰었다.


올해 우리 집 사교육 현황

요즘 우리 아이들은 하교 직후 매일 줄넘기 학원에 간다.

첫째는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매주 1회 바이올린을 배우고, 어린이 천문대에서 매월 1회 수업을 받고, ADHD 관련해서 매주 1회 언어치료를 받는다.

둘째는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요리와 미술을 주 1회씩 배우다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지금은 피아노 학원을 주 3회 다닌다.

학원이나 수업은 아이의 의사를 확인한 후 등록하고, 어느 수업이든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이유를 들어본 뒤에 더 배우고 싶지 않다는 취지면 미련 없이 그만둔다. 학원 친구 등 환경의 문제라면 개선 여지가 있을지 살펴보고 결정한다. 아이가 그만 다니고 싶다고 말하면 진짜로 그만 다니게 하기 때문에, 아이들도 사소한 이유로는 (가령 피곤해서 가기 싫을 때)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내가 사교육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학습을 위한 학원을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둘 다 영어학원에 다녔는데 올해 1월 조호바루 한달살기를 다녀온 이후 영어학원 그만뒀다. 수학이나 국어 학원을 보낸 적은 없다. 아이들 모두 학습 관련 학원은 다니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 학습기를 매일 조금씩 한다(초코, 엘리하이, 비상, 홈런 같은). 온라인 학습기를 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광고를 보고 혹해서 계속 졸랐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이 졸라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못 이긴 척 온라인 학습기를 허락한 이유는 '아이들이 학습하는 모습을 집에서 직접 볼 수 있으니 아이들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고, '매일 하교 이후 긴 시간 동안 무얼 하면 좋을지 모르겠을 때 시간 보내기 좋을 것 같아서'였다.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는 것을 대체로 좋아하면서도 주변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다니기 때문인지, 가끔씩 영어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영어학원을 다니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고,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라면 다른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고 제안한다. 이때 아이들은 내가 제안하는 다른 방법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냥 쉽게 물러서기 때문에(영어학원에 가고 싶다고 이틀 연속 조르는 경우도 없었다), 나는 아직 아이들이 영어공부를 시작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판단고 있다.


사실 나도 아이들이 영어만큼은 잘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면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외연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니까. 다른 언어로 된 컨텐츠를 즐길 수 있고,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면, 삶이 훨씬 더 풍부하고 다채로워질 것 같다. 다른 언어 여러 개를 구사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외국어 한 가지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니까 여러 외국어들 중에서 영어가 가장 배우기 쉽고,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데 효과적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루지 못했던 외연의 확장을 아이들이 누리길 바랐다. 영어를 공부해야 할 교과목이 아닌 소통의 수단(언어)으로 대하길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숙제가 많고 기강이 잘 잡혀 있다는 유명한 영어학원은 일부러 거르고, 원어민 선생님이 있고 숙제가 많지 않아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는 학원으로 골랐었다.


그렇게 첫째는 2년, 둘째는 1년간 영어학원을 다닌 상태에서 지난 겨울 조호바루에 갔다. 아이들이 영어를 쓸 일은 많지 않았지만, 식당이나 키즈카페에서 기초적인 인사나 필요한 요청(냅킨을 달라는 등)도 전혀 하지 못하고, 외국인 친구와 놀기 위한 약간의 단어(정제된 문장이 아닌 단어)도 잘 알지 못하고, 간단한 자기소개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작 2년, 1년 배운 정도로 대단한 영어를 하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지 주민이 아닌) 여행자로서 소통에 필요한 기초 단어조차도 아이들 안에 없다는 것이 다소 충격이었다. 두 아이의 영어 학원비로 한 달에 지출하는 돈이 합계 65만 원 정도였다. 일 년이면 780만 원 정도 되는 무시할 수 없는 큰 지출이다.


학원비를 들인 만큼 아웃풋을 낼 수 있도록, 숙제도 많고 기강도 잡힌 (소위 말하는 빡센) 영어학원에 보내야 하는 걸까? 나중에 아이들 인생에 영어가 필요하게 될지, 영어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제한이 없을지 모르는데 아직 어린 아이들이 영어를 잘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학원과 숙제에 투입하는 것이 맞을까? 동네에서 만난 아이들 친구들은 다들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이 싫다고 했는데, 아이들이 싫어하는 그런 학원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학원들이다. 영어 학원에 지출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역시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런 학원에 보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조호바루에서 귀국한 이후 아이들을 영어학원으로 복귀시키지 않았다. 들어간 돈만큼의 아웃풋을 만드는 그런 빡센 학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어를 소통의 수단이 아닌 교과목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슬렁슬렁 놀러 다니듯 다니는 학원에 연 800만 원 가까운 돈을 지출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은 영어학원을 보내지 않고, 그 돈을 모아 한 번씩 외국에 나가, 영어가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유용하다는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영어학원도 그만두고, 원래 다니지 않던 수학, 국어, 독서토론, 논술 등은 여전히 보내지 않는다. 대단한 소신이 있었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소신이 대단했다면 강남으로 이사가는 것을 단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부부의 제일 큰 자산이 집이고, 나중에 은퇴를 하면 이 집을 돈으로 바꿔서 은퇴 자금을 삼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집값이 더 오를 것이 분명한 강남으로 이사를 가서 은퇴 자금을 불려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했었다. 강남의 연간 집값 상승분이 내 연봉보다 많을 때도 있기 때문에, 강남으로 집을 옮기면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내 연봉 정도의 자산이 계속 쌓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사를 가면 아이들을 모두 빡세게 교육시키는 환경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남들이 다 휘몰아치는데, 나와 아이들만 멀뚱하게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내 소신은 얄팍하다. 얄팍한 소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비교적 널널한 분위기의 경기도 신도시에 눌러살고 있다.

 

왜 아이들을 공부를 위한 보습 학원에 보내지 않는 것인지?

가끔 질문을 받을 때도 있고, 스스로도 이유를 점검해보곤 한다.

간혹 '나와 남편이 모두 사교육을 많이 받지 않고도 공부를 아주 잘했으니, 아이들도 부모를 닮아 잘하겠거니' 하는 자신감에 학원을 보내지 않는 거냐고 물어오는 지인도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보내고 학교 교과과정을 따라가는 것을 보니, 내가 어릴 때처럼 그렇게 특별히 영특하지는 않은 것 같다(솔직히 나와 남편은 어릴 때부터 영특한 편이었고, 공부 머리가 반짝했다). 만약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면, 학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알아서 잘할 정도의 영특함은 전혀 아니다.   


그렇다. 나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을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유는 좋은 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고, 공부는 그중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생각을 하때문이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기업에 입사해서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직원을 위한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다채로운 형태로 좋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 좋은 삶에 다다를 있다고 믿는다. 공부가 유일한 길은 아니고, 모두가 공부를 잘하기 위해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갔고, 어린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서도 공부를 또 열심히 했다. 그래서 검찰에 근무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대형 로펌에서도 근무할 수 있었으며, 나중에는 로펌을 창업하기까지 했다. 근로자로 일했던 경험과 근로자를 고용해 본 경험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회사가 '학창 시절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이 좋은 사람'을 선호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했던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칙에 순응하고, 주어지는 요구를 감내하려 노력한다. 즉 회사의 규칙을 잘 수용하고, 주어진 일을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고, 다소 과도한 업무와 책임이 주어져도 일단은 감내하려 노력한다. 어려서는 '학생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규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공부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학생들은 대체로 어른이 되어서는 회사의 규범을 수용하고 회사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바를 수용하고 다소 어려워도 감내하며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임신 중일 때도 밤을 새워 조사 입회를 했고, 매일 이어지는 야근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 나는 로펌을 창업하기 전까지 법정 연차가 일 년에 며칠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연차를 거의 사용하지 못했고, 내가 며칠의 연차를 쓸 수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사회생활 첫 해에 부장님의 하늘 같은 은혜로 이틀의 휴가를 썼고(다른 동기들은 아예 휴가를 못 갔다), 대형 로펌에 입사하니 연차라는 개념이 아예 없고 여름휴가 겨울휴가만 있을 뿐이었다(당시에는 겨울휴가를 갈 수 있으니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었다). 반면에 중소기업에서 개발자로 일하는 남편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칼퇴를 했고, 법정 연차를 모두 사용할 수 있어서 간혹 하루씩 휴가를 내고 혼자 영화를 보러 다녔다. 내가 매일 야근을 하다 밤늦게 퇴근해서 집에 가면 남편은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거나 미드를 보고 있었고, 계절마다 하루씩 휴가를 내고 혼자(아내인 내가 휴가를 못 내니) 조조영화를 보거나 지방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느라 일찍 집을 나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공부를 그토록 열심히 했을까,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지금도 이렇게 쉼 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네'라는 자조감이 들곤 했다.


물론,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사고, 청년 노동자가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가 안전사고로 숨지는 사건, 고등학생 실습생이 현장 실습을 나간 첫날 선박 따개비를 제거하라는 요구에 잠수했다가 사망하는 사건 등 쉽게 잊히지 않는 뉴스들과 출산하는 직원에게 출산 휴가 대신 사직을 강요했다는 어느 중소기업의 횡포 등을 접하다 보면, 분노가 치솟는 한편, <안전하고 좋은 일자리>에 대한 부모들의 갈망이 이해가 된다. 내 자식이 산업사고의 희생자가 되지 않고, 안전하고 좋은 일자리에 취직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절대 나쁘지 않다. 이런 안전하고 좋은 일자리의 숫자는 구직자의 숫자보다 항상 적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학생 때부터 경쟁하는 사교육의 치열함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전하고 좋은 일자리가 반드시 좋은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내가 근무했던 검찰에서도 몇 명의 검사가 스스로 생을 버렸다. 철밥통이라 여겨졌던 공무원들도 악성 민원 등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여럿 보도되었고, 나의 학창 시절 여성에게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여겨지던 선생님이 실은 안온한 직업이 아니라는 점도 여러 사례로 드러났다. 내 동생은 선망하던 기자가 되기 위해 수년간 낙방을 거듭하여 결국 기자가 되었는데, 기자라는 직업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향과 달랐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얻었다. 가족들 누구도 동생에게 기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아무도 동생에게 기자라는 좋은 직업을 왜 그만두냐, 웬만하면 계속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기자를 그만둘 수 있었고, 시간을 두고 다른 직업을 가졌으며, 부정맥은 깨끗하게 없어졌다.


회는 계속해서 변하고,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정말 많은 직업이 있고, 부모는 그 많은 직업을 다 알 수 없으며(부모가 학생일 때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들도 생겨나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직업군이라도 그 직업과 관련된 환경이 끊임없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지금 존재하는 직업들 중에서 없어질 직업도 있을 것이고, 새롭게 생겨나는 직업군도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학생은 공부하는 것이 최고다, 공부가 최선에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길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공부하는 데만 집중하라고 요구할 수가 없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AI 시대, 미래 세대를 위한 조언을 구하는 인터뷰에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20년 뒤 인간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전혀 알 수 없게 됐다"며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초점은 '배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돼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변화에 유연한 마음을 갖는 방법과 실패나 미지의 변화에 끊임없이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를 보고 감명을 받아 기사를 저장해 두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아이들에게 학습과정을 쫓아가거나 선행하기 위한 사교육 대신 다른 것들을 가르치고자 노력 중이다. 내가 요즘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일상의 기본 습관을 바르게 잡는 것이다. 우습겠지만, 올해 우리 집에서 초3과 초1에게 가장 강조하는 세 가지는 바르게 인사하기, 바르게 걷기, 바르게 먹기다. 어이없게도 이 세 가지 기본 태도 중에서 각 아이마다 두 가지씩 잘 안 된다. 큰 아이는 인사는 잘하는데, 걷는 것과 먹는 태도가 기본이 안 되었다. 둘째 아이는 걷는 것은 괜찮은데 인사하기와 먹는 태도가 아주 별로다. 이 외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생활기술을 조금씩 가르치고 있다. 계절이 지난 옷을 정리해서 넣고 이번 계절의 옷을 꺼내기, 빨래 건조대에서 건조된 자기 옷을 옷장에 가져다 넣기, 옷걸이에 윗도리를 제대로 거는 방법, 필요 없게 된 물건을 선별해서 버리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팔거나 나눠주기, 다 먹은 그릇을 초벌로 설거지해서 식기세척기에 넣기, 계란프라이를 만드는 방법, 짜증내거나 화내는 대신 자신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제대로 말하기, 응하고 싶지 않은 제안을 단호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법 등 시시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이런 것도 가르쳐야 비로소 익히게 되는 거구나 싶은 생활기술이다.


그 밖에 아이들이 좀 더 크면 가르치고 싶은 것들이 더 있다. 지켜야 규범과 부당한 지시를 구별하는 기준, 부당한 지시에 거부하는 방법, 주어진 일에 책임을 지면서도 자신을 소진하지 않는 적절선, 광고에 현혹되지 않고 충동을 조절하며 적정하게 소비하는 방법, 사기꾼에게 속지 않는 법, 단순한 저축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융을 이용하여 물가 인상분 이상의 금융소득을 얻는 방법, 소득 중 일부를 기부하기 위해 좋은 기부처를 찾는 방법, 심심하거나 무료할 때 티브이나 유튜브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 외에도 나를 충만하게 하는 활동을 찾아 시간을 즐기는 방법 등이다. 그리고 삶에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 어떠한 길도 직접 가보기 전에는 다 알 수 없고, 막상 가보니 이 길이 아니었구나 싶을 때 다시 돌아 나와 새로운 길을 찾아갈 기회와 시간이 몇 번이고 있으니 인생 망했다고 좌절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침착해도 된다는 것.


그리고 경험상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속내를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내가 배우고 싶거나 내가 익히고 싶은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공부하라고 들이미는 대신, 내가 영어 스터디를 다니고 아침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영어를 공부하고, 책을 읽으라고 들이미는 대신 그냥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재밌게 읽는다. 그리고 내가 무엇이 되든, 아이가 무엇이 되든, 좋은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여러 기술과 태도를 여러 루트로 배우려고 노력한다. 중년이 된 이후로도 삶의 여러 가지 요소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겸손한 태도로 좋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려 노력 중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들 하니까, 아이들이 나의 이런 태도를 닮게 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가 모르는 좋은 삶이 다양하게 존재할 테고, 그 다양한 좋은 삶 중에 한 자리우리 아이들 몫이라고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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