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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Oct 10. 2021

무심이 유죄

    몸은 생각보다 기억을 잘한다. 어떤 맛의 기억은 입안 가득 생생하게 맴돌며 되살아난다.

    어쩌다 일찍 귀가한 어느 날, 빈집에서 하릴없이 부엌 근처를 어슬렁거리는데 한쪽 구석에 있는 소면 봉지를 발견했다. 갑자기 입에 침이 고이면서 매콤한 비빔국수 생각이 났다. 아내가 조금 놀라면서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며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요리와 레고 조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재료를 미리 준비해서 조립하듯 하면 된다. 중요한 양념장을 만들고 양배추와 사과, 배도 채 썰고 마무리할 오이채와 김 가루, 화룡점정 달걀도 삶았다. 어묵국의 간을 맞추는데 아내의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뭘 먹을까 묻는다. 거의 준비가 되었으니 오기만 하라고 하니 5분 안에 도착한단다. 이제 면을 삶을 타이밍이다. 면 요리의 중심은 당연히 면. 면발이 살아 있게 삶고 식혀서 채소와 섞고 양념장을 잘 비비면 준비 끝이다. 


    도착한 아내는 집 안 가득한 냄새에 조금은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해하면서 식탁에 앉고 나는 김 가루와 오이채, 삶은 달걀 반쪽을 살짝 얹은 비빔국수 한 그릇을 아내 앞에 놓았다. 나와 그릇을 번갈아 쳐다보던 아내는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내려보더니 난생처음 국수를 대하는 듯 조심스레 젓가락을 들었다. 천천히 먹는 아내는 아직 반도 먹지 못했는데 배고팠던 나는 한 그릇 뚝딱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아내가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로 와 책상 앞에 앉으려는데, 갑자기 달력의 붉은색 동그라미가 크게 확대되며 눈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아침에 나갈 때 분명히 봤는데 어떻게 저것을 깜빡했지…?’ 

   며칠 전부터 아내가 맘에 든다면서 인터넷의 가을옷 사진들을 보여주던 것, 어느 식당은 분위기가 있고 어느 레스토랑은 음식이 좋다면서 외식 코스들을 이야기한 것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머릿속에 하얗게 눈이 내렸다. 오래전 사극에서 예진 아씨를 짝사랑하는 젊은 관원이 ‘무심한 것은 고약한 것이지요’라고 말하는 장면 위로 아내의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맛이 어떠냐고 물어나 볼걸. 모처럼 한 요리가 나의 고질적인 무심함 때문에 정 맞게 된 듯하다. 그러게, 안 하던 짓 하면 탈 난다는 옛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202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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