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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Dec 17. 2021

그날, 가을은

   며칠 전 점심시간이 지났을 무렵에 이웃 도시에서의 모임을 마친 뒤 가을을 들이쉬며 산 아래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온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그러니!”

   난데 없는 여자의 큰 소리가 들려서 뒤를 보았다. 이삼십 보쯤 뒤 건널목 너머에 쉰을 갓 넘어 보이는 남자와 머리 부스스한 중학생쯤의 여자아이, 산행 차림을 한 사십 중반의 여자, 한눈에 주말 산행을 나온 듯한 가족이 서 있었다. 엄마가 딸을 혼내는 듯했다. 그런데 여자의 말에 남자와 딸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냥 제 앞만 볼 뿐이었다.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5분쯤 걸었을까. 비탈이 살짝 높아진다고 느끼는 중인데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쪽으로 가? 저리로 가야잖아!”

  여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답답하다는 듯 서 있었다. 계속 말을 해도 여전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참 노려보던 여자는 할 수 없는지 잰걸음으로 식구들을 따라오며 연신 구시렁댔다. 궁금해져서 지켜보기로 했다. 신발을 고쳐매는 척하면서 그들이 앞질러 가기를 기다렸다가 따라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남자와 딸은 산책하는 사람처럼 빈손에 가을 운동복을 입었다. 그런데 여자는 패딩에 비니 빵모자, 두툼한 바지, 등산화에 불룩한 에코백까지, 제법 산행 채비를 갖추었다. 어깨에 커다란 에코백도 메고 있다. 김밥이나 음료수 같은 것들을 식구 수대로 챙겼는지 불룩하다. 남자는 잔소리쯤은 달관한 소크라테스인양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학처럼 걷는데, 뒷모습만 봐도 표정을 보는 듯했다. 딸은 붙어 있으려는 듯, 아니 여자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려는 듯 종종걸음을 하는데 엉덩이가 자꾸 뒤로 빠지는 것을 보니 산행이 썩 내키지 않아 보인다.

   여자는 그 서너 걸음 뒤에서 앞선 식구들을 끊임없이 살피고 챙기면서 따라간다. 마당에 풀린 병아리를 건사하는 어미 닭 같다. 살피고 건드리고 간섭하면서 오르막 걷기가 당연히 힘들 터, 뒤처졌다 따라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리도 가족을 챙기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악하거나 독해 보이지 않는다. 제법 요령 있고 재주도 있어 보인다. 한때 누구보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었을 것 같다. 캠퍼스의 소문난 가수였을 수도 있고 글솜씨를 날리던 작가, 가을 풍광에 빠진 화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운명인 듯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딸이 태어나 행복은 더 커졌을 것이다. 자신의 꿈과 재능, 계획을 접어 남편과 아이, 가족의 삶을 모든 것의 앞에 자리하게 하면서도 아쉽지 않았겠지. ~~댁, ~~엄마로 불리며 이름이 잊히고 힘든 일을 만났어도 이 언덕만 넘으면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과 부딪는 와인 잔이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힘이 났을 것이다.

   아마 마흔 즈음 아닐까, 남편이 조금씩 달라진 때가. 지친 걸음으로 돌아와 혼자 생각에 빠질 때가 늘었고 의욕 넘친 모습이 점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쉰이 넘을 즈음에는 무렵 인생을 전환한다며 명예퇴직을 했으나 재취업은 되지 않아 집에만 머무르게 되었겠지. 세상을 향한 패기와 행동이 짜증과 잔소리로 바뀌어서 여자에게 휘둘러지고 마속에는 큰 상처가 차곡차곡 쌓였을 것이다.

   그렇게 남편과의 마음이 힘들어지는 동안에 자란 딸은 사춘기 복판에 서서 대꾸하며 방문을 닫기 시작했을 거야. 아들 부럽지 않은 공주로 자라던 녀석이 중학생이 되어 친구와 어울리면서 밖으로 몰려다니려고만 하고, 공부해서 대학 갈 생각을 접고 기술을 배워서 남보다 빨리 돈을 벌겠다며 여자에게 대들었겠지. 아마 오늘 아침도 거울을 들고 헤어컬링 그루프를 하더니 핸드폰을 쥔 채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을 거야. 보려니 천불이 나 산에라도 가자고 득달하여 식구들을 몰아 나왔을 것이다.


   비척비척 앞서가던 남자의 허리춤에 하얀 속옷 귀퉁이가 보이는 듯했다. 여자가 다가가서 매무새를 바로잡으려는데 남자가 휙 돌아봤다. 싫다며 뿌리치는 표정이었다. 움찔 여자가 손을 거두어들였다. 딸이 ‘오지랖이야~!’ 하는 듯 옆눈질하며 지나갔다. 그렇지만 여자는 다시 몇 번이고 남자의 뒤 매무새를 만지려고 할 것이다.

   저 여자라고 지치고 목마르지 않을리 있을까. 그리움과 아쉬움, 젊은 시절의 꿈과 목마름이 불쑥 올라올 텐데, 다시 그것들을 누르며 가족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 제 모이 먹기는 잊으면서도 자꾸만 울타리를 넘으려고 하는 병아리들 건사에만 매달리는 어미닭처럼 남편과 아이 챙기는 일로 하루 해를 보내는 집착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매번 거절당해 서운해도 다시 마음을 내미는 참지 못하는 간절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힘일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잠시 고개를 숙여 걸었다.


   “뭐해! 빨리 안 오고!”

   갑자기 아내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열 걸음쯤 앞에 딸이 핸드폰을 보며 서 있고,  여자는 그 몇 걸음 앞에서 돌아보며 딸을 부르고 있었다. 느려졌던 걸음을 재촉해서 주차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그날 가을은 우리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청계산 아래를 걸어가고 있었다.


                                                                                                                                 <2021.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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