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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Feb 04. 2022

사라져 가는 들(野)

  10월 중순, 가을걷이가 한창인 논에 후다닥! 소리와 함께 난리가 났다. 벼 사이에서 고라니가 튀어나온 것이다. 뒤이어 새끼로 보이는 놈도 따라 나왔다. 논을 반쯤 베어 들어간 콤바인이 멈추어 섰고, 밖의 농부 둘이 뛰어 들어갔다. 당황한 어미 고라니는 콤바인 쪽으로 덤비듯 달려들려다가 농부가 막아서자 몸을 돌려 개천의 덤불로 뛰어들었다. 새끼도 따라 사라졌다. 잠깐의 소동. 모두 손뼉 치며 웃었다. 

  개천의 수풀은 무성한 갈대와 부들로 덮여 하류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고라니가 어떻게 논에 살고 있었을까. 한 농부가 요즘 산에 동물이 많아졌는지 자주 농가까지 내려와 채소며 열매를 망친다고 했다. 

  ‘구만리 들’의 귀퉁이인 이 들은 위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지고 아래엔 4차선 산업도로, 좌우엔 2차선 지방도로로 둘러싸인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두 해 전에는 다시 허리께에 새로운 포장도로가 놓이면서 둘로 나뉘고, 산으로 이어지는 윗 들과 달리 아랫 들은 사방이 포장도로로 포위되고 개천을 품은 채 누워있다.

  사방이 찻길로 막혀 있는 이 들에 고라니가 들어오다니. 윗 들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서 잘못 들어왔다가 나가는 길을 못 찾고 헤매는 중일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먹이를 찾아 들어와서 그동안 숨어 살았다니 배고픔 앞에서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도망간 고라니 모자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초겨울, 매서워진 바람을 끌고 내디디던 발소리에 놀란 것일까, 푸두둥! 하며 청둥오리들이 날아올랐다. 한참 후 흰 고라니 한 마리가 여유 있게 선을 그리며 내려와 잠시 들떴던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눈이 두어 번 내리고 녹은 12월 중순이면 개천의 숲은 부쩍 사그라져 뼈를 드러낸다. 숨었던 물길이 보이고 낚시를 넣으면 잔고기 몇 마리 건질 듯한 웅덩이도 드러낸다. 빈 들엔 을씨년스러운 까마귀만 몇이 얼쩡거릴 뿐, 짐승들 모두 개천으로 몰려든 듯 제법 붐빈다. 

  제방을 따라 내려갔다 오는 산책길의 중간쯤. 정자에서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개천의 숲이 소란스럽다가 고라니가 튀어나와서 상류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중간 크기의 진도견 잡종과 애완견 모습의 두 마리가 그 뒤를 쫓았다. 고라니는 날렵하게 물과 수풀을 풀쩍거리고 제방을 뛰어넘어 들을 가로지르더니 사라져갔다. 

 개들은 들에서 살면서 사냥의 야성을 일깨웠는지 무서운 눈빛을 희뜩거리며 짖지 않고 뒤를 쫓았다. 그러나 실패한 듯 자꾸 뒤를 돌아보며 되돌아오더니 길을 바꿔 동네 방향으로 멀어졌다.

  그제서야 고라니가 한 마리였다는 생각이 났다. 두어 달 전 도망갔던 두 녀석 중에 새끼인 듯했다. 독립한 것일까? 어쩌면 산으로 가려고 도로를 건너다가 어미가 변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가 고파 흘러들었다가 혼자 되고 쫓기기까지 하는 녀석의 신세가 기구하다고 생각하다가 뒤쫓는 개를 따돌릴 만큼 자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새해 즈음, 제법 긴 출장에서 돌아와 다시 들어선 산책길이 새로웠다. 개천이 들을 좌우로 가르는 지점에 이른 순간, 검은 안경을 낯선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줄지은 트럭이 흙을 붓고 그것을 불도저가 편편하게 고르느라 왼편 들이 수선했다. 그는 들을 내려다보며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지난여름 이후 들리던 아파트 단지 조성공사가 이미 시작된 듯 보였다.

  왼편 들은 제방 둑 높이에 가까이 메워져 있었다. 며칠 뒤에는 오른편 들에도 덤프트럭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작업 속도로 보아 얼마 안 걸려서 이 들은 높은 빌딩으로 가득해지고, 땅은 검은 아스팔트로 뒤덮이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지금 이 산책길도 잘 다듬어져서 훨씬 단정해질 것이다. 그러면 외졌던 이 마을의 초라한 내 집도 조금은 대접이 나아지겠구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은근히 반가웠다.

  제방 옆 개천은 초라했다. 메워지는 들 가운데 깊은 겨울의 바닥에서 오리와 새 떼들이 예민하고 부산스러워져 있었다. 잠시 훈훈하던 내 마음 위에 안절부절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얹히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한겨울인데 모이라도 좀 주어야 할까. 터전이 없어지는데 한두 번 모이를 주는 게 무에 그리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리저리 생각을 뒤적이며 몇 걸음 내딛는데 청둥오리가 날아올랐다. 잠시 후에는 고라니도 나와 저녁 내리는 논 가운데를 뛰어 사라졌다. 저만치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해가 막 뒷산을 넘으려는 겨울날, 산노을을 등진 들 위로 옅은 어둠이 천천히 들어오는데 회색 먼지를 쓴 갈대만 개천 가운데에 서서 길어진 목으로 바람을 흔들었다. 길섶의 산비둘기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더니 나무 위로 날아가 버리더라며, ‘아직 자신에게 속기(俗氣)가 짙은가 보다’던 수필가 김규련의 독백이 가슴 속으로 밀려들었다.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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