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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환 May 19. 2024

김장과 프로젝트

매년 그 집은 그 집만의 김치 맛을 냈다.

요즘엔 가족의 구성원도 적어지고 김치냉장고도 잘 보급되어 있어서 그런지 김장철에 많은 김치를 담그는 집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엔 겨울이 시작될 즈음에 온 동네에서 김치를 함께 담갔다.


날씨가 추워진다 싶으면 집집마다 필요한 만큼의 배추를 사고, 김장 재료를 준비했다.

동네 엄마들 (그 집 김장의 PM)은 1~2주에 걸쳐서 진행되는 동네 김장 기간에 각자 김장을 할 날짜를 정했다.

혹시 조정이 필요하면 가장 나이가 많거나 목소리가 큰 엄마 (PMO)가 일정을 조율했다.

그 기간 동안 온 동네의 가장 큰 이벤트이자 high priority task는 김장이었다.


우리 집 김장을 하기로 한 전날에는 엄마는 밤새도록 배추를 절이셨고, 온 집에는 김장 재료가 가득 찼다.

다음날 동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칼이며 도마, 큰 바구니 등 필요한 도구들을 가지고 우리 집으로 모이셨고, 당시 우리 집 김장 PM이신 우리 엄마의 업무 분장 속에서 각자 자리를 잡으셨다.

무 채를 잘 써신다거나, 속을 잘 버무리신다거나 뭔가 주특기가 있는 엄마들은 어느 집에 가서든 그 일을 맡았다.


칼을 쓰는 일을 하기엔 어렸던 나는 주로 잔심부름이나 빨갛게 잘 말린 고추를 다듬는 일들이 주어졌다.

내가 왜 아줌마들 사이에서 김장을 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방학이었거나, 학교를 다니기 전이었거나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집마다 김치의 맛을 내는 스타일이 달랐기에, 그날 김장을 하는 집의 엄마는 여러 개발자들, 아니 언니 동생들에게 무 채를 더 잘게 썰어라, 젓갈은 조금만 넣어라 하는 식의 매니징을 했다.

한마디로 그 집의 김장을 할 때에는 그 집의 엄마가 PM이 되었다.

식구들이 너무 짠 김치를 싫어한다거나, 김치 속에 꼭 무언가가 들어간다거나 해야 하는 그 집만의 김치 스타일을 알고 거기에 맞게 리딩하는 역할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매번 같은 엄마들이 모여서 여러 집의 김장을 했지만, 여러 집의 김치맛은 달랐다.

매년 그 집은 그 집만의 김치 맛을 냈다.


배추를 절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집의 김장은 그날 끝났다.

끝날 시간에 맞춰 삶아진 수육과 함께 먹었던 짭조름한 생김치 맛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막걸리도 한두 모금 얻어먹었던 것 같긴 한데, 이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돌아보니 나는 '김장 프로젝트'와 같은 일들을 통해 여러 사람들이 협업하는 것들을 어려서부터 지켜보며 배웠던 것 같다.

프로젝트던 일이던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은 다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은 부모님과 당시의 어른들에게 배웠을 테고, 나 또한 가장 많은 것들은 우리 부모님과 여러 어른들을 통해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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