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에세이 | 이탈리아 나폴리 01
로마를 떠나 나폴리 첸트랄레(Napoli Centrale;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했다. 이제 본격적인 이탈리아의 테마 '스누징 르네상스'를 시작할 시간. '스누징 르네상스'가 '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사적인 자기 회복 운동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폴리에는 피자를 먹으러 왔다.
그깟 피자 좀 먹어보겠다고 숙박비와 교통비를 치러가며 하룻밤 자야하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카프리로 가는 배를 탈 게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조사해보면 나폴리가 무섭다는 얘기가 굉장히 많이 돌고 있다. 마피아의 도시라는 둥, 뻑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둥, 너무 무서워서 후딱 떠났다는 둥. 그것이 무슨 얘기인지는 나폴리 기차역에서 내리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매우, 매우, 매우 낡았다. 심지어는 역을 공사하다가 그만둔 듯한 모습. 나폴리 첸트랄레에서 숙소 근처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는데, 객차 안에 담배 피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다*.
*객차에서 흡연하는 사람을 봤다고 하면 나폴리 사람들도 놀란다. 그 때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 탄 것 같다.
이런 '나폴리'의 악명은 여행자들 사이에서만 높은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나폴리가 좋더라, 이야기하면 손사래를 친다.
"나폴리가 뭐가 좋아요, 거기 더러워요."
마치 '거기는 이탈리아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 오만상을 찌뿌린다. 이건 나폴리 시민들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이 곳에 방문한 걸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탈리아에 처음이야? 아니, 유럽에 처음 오는 거라고? 그런데 나폴리를 왔어?"
'세계 3대 미항'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폴리는 마피아의 도시인가?
그렇다.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에 나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범죄 조직 '카모라(Camorra)'가 있다. 이미 17세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카모라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마피아 중 하나이다. 시칠리아의 마피아와는 달리 비교적 수평적이며, 점 조직 형태로 활동하는 비밀 집단이다.
나폴리는 더러운가?
그렇다. 나폴리의 주요 도시 문제로 종종 언론에 회자되는 것이 바로 쓰레기 문제이며, 여기 카모라가 개입해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의 2013년 보도*에 의하면, 카모라는 이미 1990년대부터 나폴리 및 인근 지역에 산업 및 핵 폐기물을 무단 투기해 왔다. 쓰레기 순환 구조를 이용해 수익을 만든 카모라들이 그동안 매장한 쓰레기는 약 천 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체 대비 나폴리의 암 발병률은 47%, 기형아 출산율은 80%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Naples's Garbage Crisis Piles Up on City Outskirts(나폴리 쓰레기 문제 도시 외곽까지 산적)>, 2013년 11월 25일, Manuela Mesco, https://www.wsj.com/articles/SB10001424052702304465604579218014071052296
나폴리는 가난한가?
그렇다. 나폴리 도시 정비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또다른 이유는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다. 2014년 2월, 블룸버그(Bloomberg)는 나폴리가 약 10억 유로의 부채를 안고 있으며, ‘엄밀히 말해 파산한 상태(technically bankrupt)’라고 전했다.
실업률 또한 심각한 상태로, 2012년 기준 실업률은 22.6%였으며 청년 실업률은 53.6%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실업률은 10.7%였다.
나폴리는 범죄율이 높은 도시인가?
그렇다. 전세계 국가 및 도시 정보를 제공하는 Numbeo의 2019년 자료를 보면*, 나폴리의 범죄 지수는 57.86점, 안전 지수는 42.14점이다. 전세계에서 66번째, 유럽에서 첫 번째로 범죄 지수가 높다.
*<Crime Index 2019(범죄 지수 2019)>, https://www.numbeo.com/crime/rankings.jsp
세계적인 수준에서 나폴리와 비슷한 도시에는 미국 필라델피아(63위)와 워싱턴 DC(69위), 중국 광저우(64위), 멕시코 과달라하라(65위), 케냐 나이로비(67위)가 있다.
나폴리에 대한 여행자들의 평은 분명 좋지 않은 편이고, 객관적 사실을 따져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나폴리를 굉장히 좋아했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가장 좋아하던 도시였고, 심지어는 파리, 비엔나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좋아했던 도시다.
로마에서 나폴리로 떠날 때는 이미 퇴사한 지 1개월이 넘은 상태였다. 그러고도 로마와 바티칸에서 6일 째였다. 그런데도 내내 나에게서 영혼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고작 도시 구석구석을 '우와 로봇'으로 헤집고 다니면서 감탄사나 쏟아내고 있었다. 텅 빈 가슴에 채워지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나폴리 첸트랄레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숙소로 향했다. '몬테산토 역'*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기분이 치솟기 시작했다. 로봇 조종실로 소울이 들어가 합체하기라도 한 마냥.
*몬테산토 역(Stazione di Napoli Montesanto)은 나폴리 역사 지구(historical center)에 위치해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시장과 상가에 인접해 있으며, 푸니콜라레 정차역도 가까워 여행자가 머물기 편리하다.
위험 지역이라는 인식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더이상 내가 '우와 로봇'이 아니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는 거의 전쟁 중인 요새 같다. 지저분하고 몹시 거친, '시골 항구 도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몹시 어시장 같다. 그러니까 이 곳이 좋은 이유는, 이 비루한 곳이 항구 도시의 정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지저분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지만 도시 전체에서 바닷마을의 자유로움이 묻어난다. 지저분하지만 탁 트여있고, 거칠지만 정이 가득한 그 느낌.
실제로도 사람들은 거칠어 보이지만 엄청나게 친절하다. B & B* 주소에 번지만 있고 호수가 없어서 아래 층의 시끌벅적한 가정집 문을 두드렸더니 파티 중이던 남자가 세 명이나 쏟아져나와서 집을 찾아주었다. 집 주인도 몹시 친절했다.
*B & B(Bed & Breakfast): 침실과 조식을 제공하는 숙박업소의 일종. 이탈리아의 게스트하우스는 대체로 'B & B'라고 명명되어 있다. 조식으로 보통 빵과 커피 한 잔을 제공한다.
숙소 근처를 둘러보려고 잠깐 나간 김에 주전부리로 해산물 튀김을 주문해 보았다. 고깔 모양으로 만 종이에 소금과 시즈닝을 뿌린 해산물 튀김을 가득 넣어주었는데, 오 마이 갓, 환상적인 맛이 났다. 나도 대한민국의 바다 도시 출신인데 이런 맛은 납득할 수 없다. 물려서 잘 먹지도 않는 새우를 머리와 다리와 수염과 눈까지 죄다 꼭꼭 씹어 먹어치웠다.
맙소사, 나폴리가 무섭다던 사람은 누구인가.
마피아의 도시라서? 카모라가 관광객 한 명을 신경이나 쓸 리 없다. 나폴리도 거의 걸어서만 다녔고, 야경 보느라 카스텔 산 텔모(Castel Sant'Elmo)도 좀 늦게까지 돌아다녔다. 아무 일 없다.
더러워서? 다른 이탈리아 도시처럼 깨끗하고 예쁘지는 않다. 그렇지만 중세부터 흘러온 요새마냥 오래된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다. 사진에 보이던 쓰레기 더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난해서? 물가가 굉장히 저렴하다. 숙박 가성비도 좋고 식사를 주문하면 양도 푸짐하다. 게다가 맛있다, 해산물도 젤라또도.
범죄율이 높아서? 나폴리에서 지내는 동안 특별히 문제되는 일을 겪은 적이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외에 위험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일부 보도자료에서는 나폴리보다 로마와 밀라노의 범죄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고도 한다.
몹시 신이 났다. 널찍한 B & B 방 안을 뛰어다니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말 행복했다. 피자나 먹어보자, 1박 예약했던 이 도시에 나는 결국 사흘 밤을 묵게 된다. 행복하고 즐겁기 그지 없었다, 곧 천국에 이를 거라고 느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