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에세이 | 출발 전에 일어난 일들 02
세계일주를 떠날 생각이라고 하면, 흔히들 내가 원래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들 하더라. 그러나 나는 집순이의 표본이었다. 당시 야외 활동 중에 좋아하는 거라곤 딱 두 가지 뿐이었는데, 하나는 산책, 또 하나는 운동 겸 취미였던 재즈 댄스였다. 집에서는 '누워만 있는' 문제아였고, 친구들을 만나도 식사, 커피, 술, 영화, 그러니까 앉아 있는 활동 외에는 하는 것이 없었다.
그 때까지 해외로 나가본 일은 딱 두 번 있었다. 교환 학생으로 미국에 간 것이 한 번, 친구와 오키나와 여행을 간 것이 한 번. 교환 학생 때는 별도의 인솔자가 있었고, 오키나와 여행은 해외 출장이 잦은 친구와 함께 했다. 세계일주를 나설 때까지 비행기 타는 법도 잘 모르고 있었고, 호텔 예약도 스스로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여행 계획을 듣기만 하면 사람들은 해외에서 소매치기 당한 일이나 뉴스의 사건 사고들을 화제로 삼곤 했다. 세계일주 경험자들 이야기에서는 '몹시 힘들었다', '강도를 만났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니 세계일주를 목전에 둔 상황에 내 막막함이 얼마나 압도적이었겠는가. 이 막막함과 두려움을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첫째로 해야했던 일은
돌아올 길을 막는 것이었다.
첫째로 해야했던 일은 돌아올 길을 막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사직서를 내던진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그 환경으로 내던져 버려야 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되, 가능한 한 다시는 도망나올 수 없게 막는 것.
로마 행 편도 비행기 표를 끊고, 바티칸에 5박을 예약했다.
잠시 덧붙이자면, 세계일주 여행자들은 보통 한국에서 시작해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루트를 선택한다. 저가 항공 및 항로, 육로를 이용해 교통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
전 지구적 규모가 가져오는
막막함을 타파하는 것
두 번째로는 규모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전 지구적 규모가 가져오는 막막함을 타파하는 것. 사실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한 것이 이것이었는데, 이 문제는 생각 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대략의 잠정적인 루트를 만드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바티칸을 시작점으로 삼고 세계 지도를 보니, 서유럽 - 동유럽 - CIS - 중앙 아시아 - 인도 - 중동 - 아프리카까지, 지중해 동쪽으로 에둘러 구 대륙 동선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남미와 오세아니아를 지나 한국으로 돌아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북미에서 알래스카와 러시아를 지나 돌아오는 방법도 있었다.
세상을 쪼개고 나니 의외로 별 것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길을 가면 그것이 길이 될 것이었고, 여행 자체에서 오는 이끌림도 있을 것이었다. 계획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것을 탐색하고 탐방하며,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여행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변칙과 변동을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원칙이 이미 내 마음 속에 있었던 셈이다.
세 번째는 자금의 문제 (…)
최저 3천만원 수준에서 시작
세 번째는 자금의 문제였다. 세계일주에 구체적인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를 썼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 아마도 가장 현실적인 이슈일 것이다.
비용 조사는 최저 수준만 확인하는 것으로 아주 가볍게만 수행했다. 블로그 등을 좀 뒤적거려 보니 최저 3천만원 수준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몇 년을 일했으니 자금은 여력이 있는 상황이었다. 아껴 쓰고, 맞춰 쓰고, 필요하면 다니면서 일을 찾아보자, 생각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용기와 의지
'나는 돈이 없어서 그런 거 못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꼭 일러두고 싶은 것이 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용기와 의지라는 점이다. 서울 종로나 인사동에 가면 잡동사니를 팔거나 악기 연주를 하며 여행 경비를 버는 외국인들을 볼 수 있다. 과감한 여행자들이 실제로도 꽤 많다.
편도 티켓을 가진 사람들은 여행 중에 어떤 사건 사고를 겪게 될 지 알 수 없다. 빈털털이가 되고 상황이 꼬여 집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게 될 수도 있다. 노숙과 구걸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스스로 납득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어야 한다.
십중팔구 이야기하듯 정말로 여행이 경험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수중의 돈은 오히려 경험치를 쌓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여유 자금이 있을 때 늘어나는 것은 선택의 폭이지 경험의 폭이 아니다. 그러나 선택권이 있는 상황에서, 특히나 국외에서, 구태여 사서 고생할 가능성은 낮다. 따로 강한 용기나 의지가 없다면, 여행 경험은 점점 관광 서비스 상품 구매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부담 세 가지를 마음에서 덜어내고 나니 나머지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퇴사까지는 삼 개월이 남아 있었고, 출국까지는 한 달이 더 남아 있었다. 근무를 이어가면서 예방 접종, 여행자 보험 구입 등 잡무를 하나씩 처리했다.
이런 저런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으며, 종종 상념에 빠지곤 했다. 그러면서 억압해두었던 원래의 내 모습에 다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번씩 어떤 여행을 할 것인가, 가슴 설레는 상상을 하곤 했다.
메인 사진 출처: 영화 <더 랍스터>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