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네 로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주영 Aug 02. 2020

그녀의 네 번째 아이팟

단편소설 <나는 아이팟이다> 중에서


© 박주영



그녀는 환자복의 호주머니에서 하얀색 아이팟을 꺼냈다. 아이팟 5세대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나온 나의 은색 아이팟 클래식은 160기가였다. 그녀는 나의 은색 아이팟을 흘낏 거렸다. 만져보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나의 아이팟을 건넬 수는 없었다. 특히 저런 고수들에게는. 아이팟을 처음 만져보는 인간들은 아이팟을 통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공산이 크다. 어떻게 켜고 끄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테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흘낏 보고도 아이팟 클래식을 알아보고 뭐가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생전 처음 보는 아이에게 말을 거는 인간이라면 내 아이팟을 5분만 만져보고도 나의 어떤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윤주이며 나이가 나의 곱절이 넘을 테지만 자신을 아줌마라 부르지 말고 언니라고 불러 달라면서, 나에게 먼저 자신의 아이팟을 건넸다. 윤주 언니는 확실히 고수였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알려면 자기가 먼저 고백해야하는 법이다. 언니는 자신의 아이팟이 이미 용량이 꽉 찼다고 했다. 무언가를 넣으려면 무언가를 지워져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는 게 요즘은 어렵다고 했다. 그때 나의 아이팟은 아직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60기가와 160기가의 차이일 수도 있고, 3년 된 아이팟과 1년 된 아이팟의 차이일 수도 있고, 언니와 나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윤주 언니에게는 그것이 네 번째 아이팟이었다. 이전의 아이팟 셋은 죽었다고 했다. 언니는 분명 죽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납치였으며, 하나는 잠과 같은 죽음이었으며, 하나는 자살이었다고 했다.


“내가 컬러액정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고 며칠 후 애가 죽어버린 거 있지. 독한 것. 죽을 거면 신호라도 보내면 좀 좋아. 그럼 장기이식이라도 했을 거 아냐.”


언니는 아이팟에 든 파일들을 꺼내서 옮기는 걸 장기이식이라고 표현했다. 그럼 아이팟 배터리를 바꾸는 건 심장수술이고, 고장의 신호를 보내는 아이팟을 가까스로 살려내는 건 심폐소생술인가. 나는 이 언니가 병원에 오래 있긴 있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내 아이팟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는 다른 어떤 존재의 죽음도. 그것은 나의 첫 번째 아이팟이었다.




소설집 <실연의 역사> 수록

단편소설 <나는 아이팟이다>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그 여름 이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