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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Feb 16. 2022

(19) 비자가 끝날 때쯤  

호주에서의 사계절을 모두 지냈다.

여름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들은 모두 코로나와 함께 하였다. 다행히도 가게문을 닫은 곳들은 모두 열렸다. 한국과 호주는 방역에 성공한 나라라며 언론에 나오고 있었다. 일일 확진자도 전 세계 통틀어 가장 적었다. 코로나가 마치 종식된 듯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 또한 보기 드물었다. 11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날씨가 따뜻해지니 본다이 비치에는 바다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도 가득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해피 뉴 이어 라며 인사말을 나누었다. (호주는 한국과 반대로 크리스마스가 여름이다.)  


그 사이에 나는 세 곳의 업체에서 일을 받아 바삐 지내고 있었다. 한국에서와 다르게 업무 처리를 잘한다는 칭찬도 받았고, 시드니에서 너처럼 일해주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과찬도 받았다. 한국에 있었을 땐 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수였는데.... 하루하루 자신감이 올라가고 일터로 가는 게 즐거웠다.

세컨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돈 주고 구매하겠냐는 달콤한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다들 그랬던 것처럼 학생비자(거주목적)를 받아 연장할 계획을 세웠다.


이맘때쯤  나랑 유일한 단짝이었던 한국 친구는 몸이 급격하게 나빠져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 팀장 언니한테도 켈리 언니한테도 충분히 기댈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결혼한 지인들을 붙잡고 말하기엔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어 한동안 정말 많이 외로웠다.


그 친구가 돌아가고 난 다음부터 나는 앞으로 호주 생활을 더욱더 씩씩하게 적응하고자 마음먹었다. 내년인 2021년엔 한인 업무가 아닌, 로컬 위주로 직업을 갖고자 마음먹었다.

당분간은 한국 식품이나 물품을 쉽게 구입하기 위해 한인 타워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작은 스튜디오를 렌털 하여 지냈다. 그 집에선 밤마다 베란다에서는 귀뚜라미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찌르찌르 소리를 듣고 나는 귀뚜라미로 추정되는 그 곤충에게 "귀똘이"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나는 한인 신문사에서 일을 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후임으로 들어온 제시카가 있었다. 살짝 험담을 하자면 그녀는 본인보다 어린 나에게 자격지심이 있었다. 업무를 잘하지 못해 알려주었더니, 자신을 무시하냐며 펄쩍 뛰었다. 어느 날은 출근길 버스를 탔을 때 자신이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버스가 출발했다며 기분이 좋지 않다고 토로했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전기세 아끼는 법을 알려줬는데 이게 자신을 미워해 눈치를 줬다고 험담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 내가 하는 말마다 "지금 저 들어라고 하느 소리예요?"라며 신경질도 냈다.

업무가 달라 다행이었지만 사무실에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피곤했다. 그 특유의 부정적인 기운. 후아

하 팀장 언니에게 이 말을 했더니 "아 진짜 여기에(호주 한인사회) 이상한 사람들 너무 많아! 진짜 너무 많아!! 악악!!" 이라며 진절머리를 쳤다. 하 팀장 언니는 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겪었었겠지.  


제시카와의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격해졌고, 평소엔 서로에게 아는 척하지 않지만 눈이 마주치면 원한이 쌓인 듯 날카롭게 째려보는 사이가 되었다. 


의지했던 한국 친구의 귀국과 제시카와의 몇 달간 이어진 갈등,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불안한 시국, 한국으로 한번 돌아가면 다시는 호주로 오지 못하는 상황, 비자를 연장해야 한다는 압박감 등등..  나 또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도 곧 만료되어 연장이 필요했다. 나는 농장에서 일을 한 게 아니었고, 세금을 내는 일당을 받는 것도 아녔기에 세컨드 워홀 비자를 신청할 서류가 없었다. 2주마다 내야 하는 집값에 대한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던 찰나, 이 타이밍에 학생비자를 한다는 것 또한 부담스러웠다. 아니 사실 돈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내 마음이 이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자신이 없었다. 


잠이 들면서 내일 당장 마주해야 하는 제시카와의 관계도 힘들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비자를 연장할지 한국으로 되돌아갈지 고민하는 이 상황도.. 체력적인 부담감도.. 이 상황에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토요일 점심

호주는 육류가 굉장히 저렴한 편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삼겹살을 즐겨먹기엔, 고기 냄새가 조금 심한 편이다. 한인 가게에 가서 구매해야지 그 잡내가 조금 덜 하다. 그날 점심은 한인 정육점에서 벌집 삼겹살을 구매했다. 기분 전환 겸 매실주도 구매했다. 그러나 그날 난 크게 체했다. 호주에 처음 왔을 때처럼 먹었던 모든 것들을 게워냈고, 이번엔 심했는지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몇 번 헉헉 거리고 팩으로 배를 찜찔하니 좀 나아졌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소화불량에 놀라 눈물이 터져 나왔다. 혼자서 너무 아픈데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한국에서 올 때 구매해온 소화제를 한 알 먹었다. 결국 하루를 굶었다.


그날 밤 유일하게 의지했던 베란다 밖 '귀똘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아마 생명이 다 한 듯했다. 그렇게 한 달을 넘게 울어대더니.. 이름을 지어주니 얼마 안가 조용해졌다. 참 야속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혼자라는 생각이 더더욱 실감 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또한 느껴졌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가끔 친구가 전화를 하면 난 울고 있었고, 부모님이 올 때면 일부러 다 울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집 근처 버우드 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매일. 한 시간씩.

퇴근 후 바로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오디오 북을 들으며 걸었다.


흰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중년 여성을 보았다. 강아지가 뒤를 돌아보더니 꼬리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 명이서 중년 여성에게 달려왔다. 한 아이는 강아지를 반겼고, 한 아이는 중년 여성의 허리춤을 잡아 언니가 괴롭힌다며 일렀다. 팔짝 뛰는 게 누가 강아지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쳤던 그날, 난 처음으로 한국으로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했다.

항공사 홈페이지에 들어 갔더니 그 새 비행기 노선은 많이 줄어들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목요일 아니면 토요일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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