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 후 버우드 공원을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오디오 북(정세랑-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 들리는 한 구절.
그냥 나가지 말아 버릴까.
수용소에서 승균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건조하고 소박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해외에 있는 것으로 혹은 아예 죽은 것으로 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홀가분할 것 같았다. 나가는 모임은 몇 있었지만 죽고 못 사는 우저 같은 건 경험해보지 못했다. 밤마다 곰곰이 머릿속을 뒤져봐도 십 년 이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바깥세상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도.
전형적인 도피 워홀이었던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다시 우울했다. 이제 곧 서른인데 건너 아는 애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됐던데, 공무원 진급됐던데, 결혼을 했던데... 나는.... 어떡하지
잘 지내는걸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프고 외롭기만 하다.
카카오톡 프로필엔 여전히 호주의 벚꽃인 자카란다 아래에서 웃고 있는 사진으로 되어있었다.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필사적으로 과시하고 싶어서 그랬었다.
난 저녁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잤다. 그때만 되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너무 두려워서 한 손에는 911이라고 띄어놓은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왼쪽 팔에는 운동할 때 쓰려고 한국에서 챙겨 온 스마트 시계가 있었다. 심장박동수를 계속 체크했다.
한국에서 이미 불안증 진단을 받았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최고의 불안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인지하고 나를 달래주어도 몸은 불안해서 지금 미칠 것 같다며 요동쳤다.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결제했다.
그리고 다음날 학생비자 신청했던 곳에서 연락이 왔다.
"학생 비자 승인됐어요. 정말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코로나 때문에 학교들이 이유 없이 사라지고 있었어요. 지금 시국에 학생비자 나온 거면 정말 잘된 거예요. 조금 더 버텨볼 생각은 없어요? 정말 첫인상이 호주에서 잘 지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죄송합니다. 환불 진행 부탁드릴게요.."
라고 전화를 끊었다.
퇴사를 한다고 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시카는 두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러고선 나에게 "웃음이 멈추질 않네요?"라고 말했다
몸도 안좋아서 미치겠는데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37살 여자를 보니 너무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 다음날부터 퇴사하기 전까진 그 여자와는 대화도 하지 않았다.
크게 화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똑같이 유치하게 굴고 싶었다.
그 출퇴근 할때면 그 여자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인사했고, 퇴사를 할땐 제시카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에게 선물을 돌렸다.
그리고 단체카톡에 '모두들에게 선물을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라고 글을 적었다.
그날 꿈에서 제시카가 나를 울면서 째려보는 꿈을 꾸었다.
사실 제시카랑 나랑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제시카 혼자서 나한테 화가 많이 나 있었다.대충 짐작한건데, 나이도 어린게 본인보다 직급이 높은게 배가 아팠나보다. 어느날은 나보고 '우리 회사 이제 나이순으로 직급 정하자'라고 말하더라. 그 말에 난 대답하지 않았었다.
아, 그리고 퇴사를 한다고 했더니
회사에선 이러는 법이 어디있냐며 코로나 때문에 사람도 잘 구해지지 않는데 이건 좀 아닌것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을 관두겠다고 단호하게 말했고, 한인 회사 답게 나보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2주동안 무급으로 일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 뒤 약 2주동안 자가격리를 하게 되니 그때 동안 일을 봐주겠다고 하긴 했다.
(다행히도 후임자가 들어와서 일주일 정도만 일했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했다.
중고로 구매한 밥솥도 팔았고, 아침마다 과일 주스를 마실 거라며 구매했던 믹서기도 팔았다. 예쁘게 입고 다녀야지 하면서 사 왔던 옷들과 구두들도 모두 팔았다. 호주 오자마자 구매했던 노트북도 팔았다. 물건 하나하나 정리할수록 한국에서 챙겼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집 근처 해외 택배 배송이 가능한 곳에 가서 모두 짐을 부쳤다. 그리고 마트에 들려 한국 도착하면 지인들에게 선물할 영양제와 약품들을 구매했다.
호주에서 만든 계좌도 모두 닫았다. 아, 그 중 하나는 닫지 않았다. 뭔가 다시 호주에 돌아올 것 같아서.
스튜디오 열쇠도 주인에게 반납했다. 팔기엔 애매했던 소금과 설탕, 밀가루 같은 음식들과 그 외 소스들, 각종 식기류는 하팀장 언니에게 전달해주었다.
백신이 곧 상용화된다는 소식이 들리니, 머지않아 다시 여기로 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아쉬울 때 떠나는 게 맞을 거야, 난 여기서 끝난 게 아니야 라며 나를 달랬다.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으로 왔다. 내가 작년에 호주에 놀러 왔었을 때 그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휑 할 뿐이었다. 오늘 운행하는 비행기는 단 2대였다. 대한항공과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한 대.
티켓을 체크하고 면세점에 들렸다. 비행기 안에서 공황장애가 생길까 두려워 납작 곰돌이를 구매했다.
항공 직원들은 모두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승객들도 서로 떨어져 앉아있었다.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마음이 안도가 되었다.
워홀러 커뮤니티에 "저 한국으로 돌아가요"라는 글을 올렸다.
댓글엔 "Welcome to Korea"라는 댓글이 달렸다. 웰컴투 코리아..
난 예상한 것처럼 비행기 안에서 또 호흡이 좋지 않았고 그때마다 납작 곰돌이를 꼭 껴안으며 눈물을 삼켰다. 제발 제발 나 괜찮아지게 해 주세요. 제발 조금만 버텨보자 제발.. 이제 곧 도착이야..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 도착했다. 드디어 한국으로 왔다.
군인들의 안내를 받아 내 주민번호와 자가격리를 할 집 주소를 5번 이상 적고 난 뒤에 안내에 따라 KTX를 탔다.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는 걸 찍어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 보냈더니
"눈을 안 본 지 정말 오래됐네. 조심히 가. 다음에 또 보자"라는 답변을 받았다.
KTX에 내려 코로나 검사를 바로 진행했다. 진행 후 주차장으로 가니 보이는 엄마 아빠의 모습에 5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천천히 걸어갔다. 차 안에서 계속 울었다. 그냥 계속 울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안도가 되었는지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