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온 지 1년이 지났다
1년 동안의 나의 근황은
처음 도착하자마자 공황장애 치료부터 시작했다. 양약으로 치료를 할까 한약으로 치료를 할까 하다가
일단 자가격리가 끝나고 집 근처 한의원으로 갔다.
한의원에서 이것저것 보더니 '화병'에 걸렸다고 진단을 내려주었다.
세상에... 여유롭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했던 호주에서 내가 화병을 얻어걸려왔다니...
그럴 만도 한 게 코로나도 그렇고, 가서 만난 사람들과의 사소한 다툼에도 크게 불안을 얻었으니
불안한 마음이 꽁꽁 쌓이고 쌓이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한의원에서 보약 한 채를 지어먹고 난 뒤 아픈 건 많이 사라졌다.
일자리를 구해보고자 했는데, 다행히도 집 근처 공기관에서 계약직 디자이너를 구한다 하여 1년간 계약직으로 편하게 일했다.
호주에서 만났던 절친 '포도 방'과는 긴 인연이 닿아 연인이 되어 며칠 전엔 우리 집에 인사를 하러 왔다.
아마 다음 주 중으론 내가 '포도 방' 집에 인사를 하러 가지 않을까 싶다.
우린 장거리 연애지만 만날 때마다 한국에 오면 하고 싶었던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해내가고 있다.
우린 서로 호주에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며 추억하고 회상한다.
처음에 너무 힘들어서 생각도 하기 싫었는데, 이젠 "우리 그때 참 재미있었어"라고 말의 끝맺음을 짓는다.
우리의 관계는
처음 동갑내기 친구가 생겼다고 말했을 때 '이러다가 너네 결혼할 것 같은데?'라고 말했던 캘리 언니의 말을 듣고 손사래를 치던 내 모습이 민망할 정도다.
캘리 언니는 최근 예쁜 아들을 낳았고, 하 팀장 언니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일 욕심이 많았던 캘리 언니는 나에게 간혹 호주에서 디자인 업무를 받아와 전달해주곤 했다.
난 당시 호주에서 쓰리잡을 뛰었는데, 한 업체 제외 모든 업체와는 연락이 닿고 간혹 일을 받아서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좋게 봐줬다는 거에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한국에서 1차 백신을 맞았다.
2차 백신을 맞으려고 날짜를 보고 있는데, 2차 백신을 맞은 자에 한하여 국경을 연다는 호주 뉴스를 봤을 땐
마음이 괜히 설레어서 잠이 오질 않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난 호주에서 너무나도 힘들었고 외로웠지만, 기억은 점점 왜곡되어 이젠 휴양지를 다녀온 듯한 기억만 남아있다.
힘들었던 기억은 생명을 다해 말라비틀어져 바람에 모두 날아갔나 보다.
최근엔 한국 호주 편도 티켓이 700불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도 열렸고, 다시 조심스럽지만 정상화되려고 하는 듯하다. 인건비도 많이 올랐고, 일할 사람이 없어 취업은 너무나도 잘된다며 켈리 언니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한국에서의 나 자신이 작게만 느껴진다.
반드시 외국인들과 함께 일을 할 거라며 다짐했던 그 시간이 아쉽고, 2021년도에는 호주에서 제대로 된 취업을 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아쉽고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많이 성장했다.
정말 많이 성장했다.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나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나'에 대해서 많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먼저 사과하는 게 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브런치엔 다 적지 못했지만 호주에서 과거의 철부지 없던 나와 많이 닮은 사람들을 만나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도 했다.
그 뒤로 조금 더 차분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생활력도 많이 강해졌다.
본격적으로 독립도 했다. 빚이 조금 생겼다.
결론은, 난 한국에서 그때의 추억을 갖고 정말 잘 지내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적기 시작한 건 내가 호주에 가고 싶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할까 봐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돌고 돌아 끝을 맺게 되었다.
해외에 가고 싶다는 나의 약속을 내가 겁에 질려 잊게 될까 봐 목 뒤에는 작게 나침판 타투도 새겼었다.
결과가 어쨌든, 난 다녀왔다. 늦은 나이에 다녀왔지만, 잘한 것 같다. 내 성격상 조금 더 어린 나이에 다녀왔으면 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왔었을 듯싶다.
또다시 한번 나의 마음에 봄바람이 불어오면,
알 수 없는 설렘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생기면,
그때 다시 한번 달려가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