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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l 20. 2024

한국에서 ‘자존감(自尊感) 세우기’는 가능할까


<책은 도끼다>의 저자인 박웅현씨는 <여덟단어>에서 자존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존을 설명하는 가장 직관적인 설명은 이고요는 이고요일 때 매력적이라는 것이지요.

 * ‘이고요’는 필자의 실명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삶의 기준을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찾기 보다는 바깥에서 기준을 가져와 원래 있던 나에게 맞추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수십년동안 물질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맹목적인 질주의 여파가 현재까지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 우리 사회에는 그 질주로 말미암아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주류와 기성세대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워낙에 빠른 속도로 질주해온 자신들과 모든 면에서 극적으로 다른 후세대가 공존하게 된 독특한 시대를 맞이한 상황이지요.


지난 2-30년 간 이루어진 질주는 너무 빠른 나머지 경제 성장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은 모두 발로 차고, 몸으로 무너뜨리며 이루어졌습니다.


공동체적인 가치, 개인의 고유성 존중, 인권 등 경제 성장과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 그 희생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제 성장을 위한 질주를 하면서도 사회의 안정성은 갖췄어야했기에, 당시 지도부는 가장 편리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을 말 잘듣는 착한 시민으로 만들자‘는 마음 때문일까,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뾰족한 것이 없기 위해 깎아버리는’ 일률적인 교육 정책을 시행합니다.


일률적인 교육 정책을 '시행했다'기보다는 '지속했다'가 더 적절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일제를 겪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기에, 한국과 ‘일률적인 교육’은 너무나 잘맞았습니다.

이러한 교육 기조는 찰떡같이 한국사회에 붙어 지금까지 교육제도는 변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시대는 뜨거운(?) 질주의 당사자들이 여전히 생존해있는 특이한 시대입니다.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이 신세대가 너무나 이해가 안되는 나머지 아랫세대를 모두 MZ세대로 퉁쳐 구분해버렸습니다.

 * 질주 당사자 세대와 함께 그 자녀 세대까지를 이 글에서 기성세대라고 하겠습니다.


영문도 모른채 MZ세대라는 것이 되어버린 세대들은 “우리는 MZ구나” 받아들였습니다. 뭔가 이상하긴하더라도요. 기성세대의 영향력은 ‘MZ세대’ 용어 사례만 보더라도 여전히 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해야할 이야기가 많지만 ‘한국에서 자존감을 찾기 어려운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자존이라는 글의 주제로 돌아오자면, 자존이라는 것은 자신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위에 언급한 여러 상황(간단하게 다루었지만) 들로 인해 ‘개인’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은 넓게 말하면 가치를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는 이야기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사람 한사람이 가진 가치관, 특성은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과 철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고, 토론과 토의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독서가 생활의 당연한 부분이 아닌 교양 쯤으로 취급되는 현실이 우리 사회가 관념적인 가치를 다루는데 서툴다는 몇가지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다.


여러 증거 중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온라인 댓글입니다.

핫한 인터넷 기사 하나를 클릭해 댓글창을 보면, 욕설과 비방이 가득합니다. 어떤 기사를 보더라도요.


자신과 다른 가치를 가진 무리나 개인에 대한 서슴없는 비방은 ‘나와 다름’에 대한 사회적 배척의 강도가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익명성에 가려져있는 온라인 환경은 개개인의 영혼을 보여줍니다. 어떤 댓글창도 한결같다면 이는 곧 그 사회의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넷 기사를 볼 때마다 기사 내용과는 별개로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저사람을 모르고',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라는 두가지 간단한 사실이 자기 안의 영혼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트리거가 되는 것이겠지요. 악성 댓글을 게시하는 분들에겐 죄송합니다만, 우리 사회가 양산한 '안타까운 존재'들이라고 감히 표현하겠습니다.


박웅현 작가는 <여덟단어>에서 “내 안에서 자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풀빵을 팔아도 행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100억을 벌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저는 박웅현 작가를 만난다면 “당신이 말하는 자존의 경지는 이 사회에서 격리되어있지 않았던 이상 건실하게 갖추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라고 조심스럽고 예의있게 말씀을 드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선을 신세대들에게 옮겨와보겠습니다. 이들의 고충은 참 묘하고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의식이 깨어나면 깨어날 수록 고달픈 세대입니다. 그냥 대학가고, 회사 다니고, 결혼하고, 애 키우다가, 죽음에 이르는 공식에서 벗어나 자신을 표현하거나 색다른 시도를 하면 사회에 순응하는 모든 세대로부터 파도를 맞습니다. 젊은 혈기로 곤조를 지키기에는 그들이 선 판부터가 일찍이 기울어져있습니다.


그런 신세대들에게 SNS는 자존감 갖추기를 방해하는 ‘기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기름만 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위에 말씀드린 한국 사회의 과거 배경이나 상황이 기름에 더 커지는 ‘불’이 되어 시너지가 됩니다.


자기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과거의 시류에 따라 물질적인 성공을 선망하거나, 그것을 이룬 자들이 SNS나 방송을 타고 대중들에 전파되면, 그들은 이게 ‘역시나’ 정답이구나 멋있다는 생각을 갖고, 물질적 성공에 대한 어필을 재생산합니다. 악순환인 것이지요.


‘행복하고 웅장하게 결혼하는 모습’, ‘멋진 외제차와 차키, 고급 시계를 찬 모습’, ‘해외에 여행가서 풀빌라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눈에 그려지지 않으신지요.


과거 사회가 제시한 ‘정답’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얼마전 한 지인께서 “작은 것도 크게 느껴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분께 “보통의 존재가 사고하는 당연한 것이니까 스스로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말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지인을 위로하기 위해 멋스럽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그런 걱정과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기에 지인의 고민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라면 높은 확률로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존감을 갖지 못해 고민하는 분들에게(저 스스로에게도) 이야기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신의 고민과 불안, 걱정은 당신의 문제나 결점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안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우직하게 실현해나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가 미래에 멋지게 발전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런 분들이 찍은 점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멋진 점묘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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