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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Dec 31. 2020

제레미 리프킨 <글로벌 그린 뉴딜>을 읽고

2020년 마지막 날 쓰는 2020년 마지막 책 독후감

2020년 복잡한 한국 정가 소식 중 단연 "그린 뉴딜"은 청와대 발 핵심 어젠다임에 분명하다. 최근 한국에 태양광 대규모 발전을 필두로, 탈원전, 그린 뉴딜 이니셔티브 등의 정책들이 혼잡하게 얽혀있는 모습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대두도 되기 전, 우리는 그 패러다임을 준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회를 목격한다. 교육에는 코딩이 들어섰고, 주식에는 AI, IT 관련 종목이 상한가를 치고 있으며, 전기차 기술의 발전과 상용화라는 기술의 혁신도 보인다. 


나는 도대체 그린 뉴딜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잘 읽지 않는 현대 인문학 서적 한 권을 펼쳤다. 제레미 리프킨 교수의 책은 간결한 문체,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저서인 <공감의 시대>, <엔트로피>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얼마 전, 뜬금없이 백 분 토론에 제레미 리프킨 교수가 실시간 화상 연결이 돼 한국 대중들 앞에서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권 사람들이 깊거나 얕거나 그의 책을 읽고 영감을 받은 것 같다. 


그린 뉴딜 하면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푸른 숲의 보전, 친환경 에너지의 사용, 무언가 환경친화적인 깨끗한 요소들을 떠올릴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적 어젠다로서 우리 생활 곳곳에 정책, 법률 및 비즈니스 모델로 스며들기에 나와 당신이 알고 있는 '그린 뉴딜'의 모습은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지식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그러나, 정책입안자들 스스로가 모호함을 견지해 단기 과제에 매몰되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여전히 우리 국민의 여론은 탈원전에 비판적이고 급속도로 확산되는 태양광 대규모 발전에 부정적이다. 나는 기술 전문가가 아니므로, 무엇이 옳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실 옳음을 판단하고자 한다면 단기와 장기적 시각 모두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이 강조하는 재생에너지는 그린 뉴딜의 일부일 뿐이다. 그보다는 민간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세제혜택, 기술적 원리, 법률 제정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만약 우리 위정자들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과감한 대규모 태양광 발전에 매달렸다면, 책의 입장에서는 곡해한 것과 다름없다. 발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발전을 누구와 어떻게 공유하며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지다.


<글로벌 그린 뉴딜>은 3차 산업혁명으로의 이행 중 '그린 뉴딜'의 개념과 정책을 위한 촘촘한 제언들이 담겨있다. 주로 미국에 대한 제언의 문체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제레미 리프킨 교수의 이론과 실무 경험을 토대로 EU와 중국 수뇌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의 일화, 정책 결정 과정 그리고 결과 등을 자세히 소개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국인이 불과 1-2년 전부터 갑작스럽게 추상적으로 접하게 된 '그린 뉴딜'이라는 개념이 실은 10여 년 전부터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얼마나 고뇌의 철학적 고민과 수많은 이해관계자들과의 토론 그리고 현재 법제화 등을 통해 성립된 개념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 점부터가 바로 한국인들에게는 뼈아픈 비판의 대상이 되겠다. 


그린 뉴딜의 핵심은 '인프라'다. 첫 장에서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그린 뉴딜이 성과를 올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최근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한국인들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AI의 활성화를 고민하는 와중에 유럽과 중국, 미국 등 세계 강대국들은 그 건널목으로 3차 산업혁명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재의 기술 발달이 활용될 수 있는 범위에서 사물인터넷, 재생에너지 사용 및 효율의 증대, 운송의 혁신 등에서 기존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패러다임이 재생에너지로 옮겨가고 있다. 


책에 의하면, 이는 단순히 환경친화적인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마음껏 사용해왔던 화석연료의 종언을 선포하는 것은 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이 있을 것이다. 먼저, 비용에 의해 화석연료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다면, 현존하는 관련 산업이 모두 사라진다. 그 산업이 사라진다면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며, 그 산업에 투자되던 금융이 갈 길을 잃는 것이며 정부의 보조금 또한 마찬가지다.


거꾸로 그린 뉴딜에 의해 새로운 금융, 산업구조, 교육, 건축, 법률 및 정부 정책 등의 방향이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내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던, 단순히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간학문적, 부처 간 협력이 필요한 커다란 '패러다임의 전환'임이 틀림없다. 


이 책의 묘미는 그런 저자의 경험, 실무, 강대국 위정자들의 의지와 의사결정 과정을 엿보는 점에 있다. 더불어, 대한민국의 그린 뉴딜의 방향에 얼마나 많은 담론과 지식 그리고 위기의식이 필요한지 느낄 수 있다. 


물론 몇 가지 비판도 가할 수 있다. 


먼저, 저자는 국제정치의 심리를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전력 그리드의 수평적 전환과, 사물인터넷 보급의 증대로 사이버 테러, 데이터 센터를 보유한 우량 기업들의 반유리적 행태 및 독점에 대한 경계도 등한시할 수 없다. 민간 차원에서도 이토록 큰 위협이 새롭게 대두되는데 힘의 경쟁이 아직 살아 숨 쉬는 국제정치 단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저자의 전망은 지나치게 핑크빛처럼 보인다. 특히 중국에 대한 후한 평가가 그러하다. 나는 여전히 그 시각의 객관성을 의심한다. 


둘째, 화석연료와 기후변화에 대한 경계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왜 지금까지 패러다임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는지, 그 사이에 어떤 기술 발전과 효율의 증대, 인식의 변화 등이 이루어졌는지 분석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단순히 지금까지 사용했으니까, 사용해왔다! 그러니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단지 나는 궁금하다. 그린 뉴딜로의 전환이 그토록 급하다면 단순히 무지해서 이전에는 실행하지 못했던 것일까? 기술의 한계로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저자의 비판의 수위는 낮아져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수십 년 전 저자가 적은 <엔트로피>의 용두사미 된 결론의 해법을 노년의 나이에 찾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역시 세월에 의해 기술이 진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사유일 것이다. 열역학 제 1, 2 법칙에 의해 엔트로피의 증가로 우리의 삶이 위협됨을 강조했던 책 <엔트로피>에서 결론 없이 산업혁명 이전처럼 살아야하지 않을까? 라고 어설프게 주장했던 저자의 사유가 기술의 진보로 그린 뉴딜이라는 해법을 통해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을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의 인생에서 사실 상 학문적 사유의 큰 흐름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책을 읽는 한 명의 지식인으로서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을 읽으며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기술이 정치의 영역에 들어서면 얼마나 많은 이해당사자, 시간, 비용, 그리고 토론이 필요한지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문화에 일침을 가하는 것 같아 한 편으로는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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