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특집
2011년 가을 군대 가기 전 약 2년의 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어설프면서도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마치 신문물을 경험하며 개화하듯 나는 지방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의 교육을 받으며 두 번째 대학입시 수험생활을 보냈다. 그때의 깨달음과 보람이 너무나 강렬했던 나머지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자존감과 책임감에 휩싸여 예비 고3 윈터스쿨을 시작으로 n수생 그리고 두 번째 윈터스쿨에서 예비 고2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멘토로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은 단순히 공부를 치열하게 하고 공부에 관한 깨달음을 얻어 공부 기술자가 된 것을 넘는다. 나에게는 인생의 도전이었고, 성인으로서 내 삶에 처음으로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순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자리에 똑같이 단체 체육복을 입고 앉아 산골짜기 꼭대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그들의 삶에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고픈 사명감이 생겨난 건 아닐까. 그렇게 나의 열정과 순간이 만나 사람을 알아가고 사람을 사랑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말이 남녀사이에 그렇고 그런 뜻을 초월해 인류애적인 무엇을 뜻한다면 내가 경험했던 오묘한 감정은 사랑, 인류애가 맞을 것 같다.
우리 부모님들은 위대하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가늠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수능을 두 번 치르면서 우리 부모님, 특히 우리 엄마는 수험생 못지않을 만큼 걱정하고 또 마음 졸일 일을 많이 겪으셨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수학조교로서 멘토링을 하며 그 마음을 조금 느꼈던 에피소드가 있다.
윈터스쿨 우리 반 서른 명 남짓의 학생들은 나에게 애증의 관계였다. 스마트폰이 없어 지금과 같이 연락이 쉽게 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다. 당시엔 여전히 공부하는 학생이 휴대전화를 가족 및 소수의 일적인 연락 외에 사용하는 것을 '방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남아있었다. 더군다나 우리 반 학생들은 윈터스쿨을 마치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가면 고3의 신분이다. 5주간 동고동락하며 정이 들어 보고 싶고 공부에 도울 것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 조차 방해가 될까 봐 선뜻 연락을 먼저 할 수 없었다. 누가 시키진 않았지만 나 스스로 엄격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2010년 2월 이후 11월 수능까지 우선적으로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동생들에게만 답장을 하는 다소 소극적인 방식으로 내 마음을 달랬을 뿐이다.
종종 내가 다니는 대학교 캠퍼스로 찾아오는 기특한(?) 아이도 있었고, 정말 가까이 살아서 이따금씩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며 고충을 들어준 학생들도 있었고, 지방에 있어서 얼굴은 못 보지만 잊지 않고 모의고사를 치를 때마다 연락을 주는 동생들도 있었다.
그리운 마음을 마음 한편에 고이 접어두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수능 전 날이 되었다. 나는 그사이 재수정규반에서 n수생들을 주말마다 가르치며 수능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 첫 제자이자 나와는 두 살 차이 났던 친동생 같은 녀석들이 많이 생각났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오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이 수능 전날인데 애들한테 전화 한통 정도는 먼저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마음은 그전부터 수십 번을 만나고 연락을 했겠지만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해 끝까지 고민이 됐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나름의 페이스가 혹여나 내 전화로 깨지는 않을까. 고민을 하다 아싸리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딸깍! 여보세요?"
"아... 내가 사실 방해될까 봐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전화한 건데... 내일 수능 무사히 잘 치렀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려고 전화했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대답이 들려왔다.
"아! 진짜 오빠! 왜 이렇게 늦게 했어요. 전화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짠하고 가슴이 꿍해졌다. 아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일이 시험이라는 생각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동생들. 어쩌면 따뜻한 응원 한 마디 필요한 것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첫 전화를 하면서 그동안 묻지 못했던 이런저런 안부와 함께 다음 날 시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끊었다. 전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대학로 입구까지 내려와 버렸다. 버스를 타기 직전에 용기를 얻어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그렇게 장장 3시간을 대학로 한복판에 서서 20명이 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전화를 나누고서야 귀갓길에 오를 수 있었다. 한 아이는 콧물을 훌쩍거리며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그 아이의 몸상태가 얼른 좋아지길 간절히 바랐다. 어떤 아이는 차분하게 기출문제를 풀고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답게 차분한 기색이 있었지만 그래도 수능을 맞이하여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음을 느꼈다. 한 아이는 뜬금없이 "형! 거기서 저한테 파이팅 한 번 크게 외쳐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옆에서 쳐다보든 말든 나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목소리가 떠나갈 정도로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여담이지만 그 친구는 후에 내 대학교 후배가 됐다. 수능을 앞두고 밝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들려줘서 나도 고마웠다. 다른 여러 아이들과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동시에 그동안 연락 못해서 듣지 못했던 서로의 이야기도 짧게 나누었다.
그렇게 나는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당시 나는 다른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절친이자 조교로 함께 일했던 창주가 바로 아랫방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창주와 저녁에 맥주를 한 캔 하며 밤을 보내면서 다가올 수능시험의 경향도 예측해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들었다. 학생들 모두가 편안한 잠자리에 들길 바라면서.
날이 밝았다. 수험생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른 아침 일어났다. 그냥 눈이 떠졌다. 우리 동네 주변은 생각한 것만큼 고요하지 않고 시끌벅쩍했다. 마치 너희가 수능을 치러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날은 목요일었고 내 대학생활 1학년 2학기 중에서 수업이 가장 많은 날이었다. 나는 문득 수능장에 들어가서 준비하고 있을 동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데 이제는 더 이상 해줄 수 없다. 지금이야 말로 그들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그 순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를 끝까지 해주고 싶었다. 무엇이 있을까? 그래 기도밖에 없구나. 가톨릭 신자인 나는 전국 곳곳에 있는 우리 반 학생들을 위해 기도를 하기로 했다. 근데 내 일정에 맞춰서 짬짬이 기도를 하려고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오늘 학교를 빠지고 성당으로 가자."
우리 엄마는 내 수험생활 2년 동안 꼬박꼬박 성당에서 나와 다른 수험생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를 하셨다. 직접 본적은 별로 없지만 고3 때부터 재수할 때까지 그 소식을 종종 접했다. 어찌나 열심히 기도를 해주셨는지 그 기간 몸도 많이 상하셨다고 한다. 문득 그 기억이 떠올랐던 걸까? 나는 학교 앞 성당으로 무작정 향했다. 결석 한 번 지금까지 한 적이 없는데, 딱 그해 그날에 나는 무단결석을 했다.
무작정 1교시 언어영역 시작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성당에 들어가니 자리 잡은 사람들은 전부 학부모들이었다. 그들은 성당 벽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시간에 다 같이 시험을 치르고 있을 자녀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다. 솔직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른 시간 모두가 학부모인 그 공간에 시험을 치러도 될 법한 나이의 학생이 앉아있으니.
묵주기도를 했다.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해주신 대로 시험을 치르는 시간에 기도를 했고, 학생들이 쉴 때 나도 쉬었다. 학생들이 밥을 먹으러 가면 나도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다시 돌아와 시험을 치를 시간에는 나도 기도를 했다. 그렇게 나는 수업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대성당에 앉아서 기도를 했다.
손 발이 시리고 엉덩이가 딱딱해져도 개의치 않고 기도를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마음이 충만해서 하다가 나중엔 많이 지쳤는데 그때부터는 그날 버텨온 게 아까워서 오기로 자리를 지켰다. 나는 핸드폰에 내가 기도 속에서 기억해야 할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왔고 그 이름들을 보면서 기도를 했다. 오후 5시가 넘는 시간, 이제 사회탐구가 끝나고 제2외국어에 들어갈 시간이다. 대부분 사회탐구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나도 기도를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정말 지쳤다. 하루 종일 정신을 집중해서 기도한 것도 대단했지만, 그 추운 곳에서 나나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가르쳤던 동생들이 시험을 잘 치렀을까 하는 애타는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전화가 한 통이 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전화를 건 이 친구는 재수정규반에서 나의 광신도를 자처하며 함께 했던 학생이었다. 언제나 같이 목소리에 활기가 있지만 지친 여력이 목소리에 가득하다. 시험을 잘 못 본 것 같아서 아쉽지만 그동안 고마웠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나도 채점하고 끝까지 가야 입시가 끝나는 거니까 미리 실망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고된 하루가 끝났다. 그렇게 나는 그 하루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을 기억했다.
전국에 있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이 글을 빌려 감사인사를 다시금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