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의 윈터스쿨에서 근무할 때 한 번은 학원 내 사정이 변변치 못해서 수학조교들은 떠돌이처럼 이리저리 숙소를 옮겨 다녀야 했던 적이 있다. 원래는 학생들과 동일하게 정식 기숙사에서 자는 것이 계약조건이었는데 고객인 학생들이 추가적으로 입소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본래 숙소가 아니었던 공간을 개조해 임시 숙소를 만들거나 양호실, 혹은 건물 꼭대기 층의 상주 직원 숙소를 조금씩 나눠 써야 했다. 불만도 많았지만 그 상황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같은 또래의 동료 수학조교들과 놀면서 기숙생활을 하니 재미도 있어 그러려니 넘어갔던 것 같다.
조교들은 학생들 수업이 종료되는 평일 오후 3-5시부터 근무를 했고 주말엔 오전부터 밤까지 일을 했다. 일이 끝나면 학생들은 저녁점호와 함께 잠을 잤고 대학생 혹은 입시결과를 기다리는 예비대학생이었던 우리는 밤늦게까지 놀다 잠에 들고 아침 늦게 일어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교대하는 여러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학원에는 다양한 직원들이 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입시담임으로 점심 먹기 전에 출근하고, 기숙사 사감은 보초를 서듯 야간에 근무하고 아침 자습시간까지 면학분위기를 조성후 오전 1교시 수업이 시작되면 교대하며 업무를 종료했다.
추운 겨울 윈터스쿨 비번인 어느 날이었다. 숙소에서 일찍(보통은 점심 먹는 시간까지 넘기며 전날 야식 및 음주 등의 이유로 늦게까지 자다가 출근 직전에 일어나지만, 그날은 유독 배가 고파 점심때 기상했다) 일어나서 배회하다가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야간 담당 선생님 두 분을 만났다. 내가 재수할 때에도 근무하셨던 분들이어서 얼굴을 서로 얼굴을 잘 알고 있다. 하나 죄송했던 것은 나는 사실 그분들의 성함을 몰랐는데 그분들은 내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변명하자면 내가 공부하던 때는 늘 취침시간이나 비몽사몽 하는 시간에 항상 근무를 서셔서 딱히 관계를 맺어 갈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기숙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선생님 성함을 꼭 부르지 않아도 의사소통은 되었으니... 어찌 되었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주고받는다.
일명 야간 선생님. 기숙학원의 학생들에게는 참 애매한 존재다. 첫째 괜히 공공의 적이 되기도 한다. 모성 같은 친절함을 보여주는 여자 사감 선생님들은 잘 모르겠는데 특히나 남자 선생님들은 무척 엄했다. 기숙학원이 반 군대처럼 운영이 되다 보니 누구나 싫어하는 소위 '빡센' 분위기가 연출이 될 때가 많다. 지금은 시대와 분위기가 바뀌어 얼차려를 주거나 사교육은 물론 공교육에서도 언성을 높이기 쉽지 않다.
게다가 아침에 눈뜨자마자 군대처럼 시간을 재촉하고 잠을 깨우기 위해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이 잡듯이 학생들을 다그친다면? 반항기 많은 20대 초반 학생들이라면 보통 짜증이 많이 날 것이다. 야간 선생님들은 학원의 방침대로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들이 자는 시간에 업무를 하다 보니 유대관계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아침 점호와 같은 민감한 시간대에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 괜히 갈등도 생긴다. 그래서 소수의 학생들이 선생님들한 테 반항을 하거나 대드는 사고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내 수험생활을 돌이켜 보면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자기 공부를 하기 바쁘므로 각 반의 담임선생님이나 학과 선생님 들 빼고는 딱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필요도 또 여유도 없다. 그래서 야간 선생님들의 존재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어떤 야간 선생님들은 조용한 근무시간을 활용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영화를 보다 선잠을 자기도 한다. 따라서 학생들의 시선에서는 그들이 무관심해 보일 때도 있다.
반면 아침자습을 시작하고 한 시간이 넘는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을 야간 선생님들이 교실에 들어와 직접 어깨도 주물러 주고, 지나가다 학습계획서(다이어리, 일기, 복습 등의 목표로 매일 작성하고 담임선생님의 검사를 받은 의무 노트)에 짧은 격려 편지도 적어주기도 한다.
이렇듯 야간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참 애매한 존재이다. 깊은 관계로 가려고 하면 시간상 헤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글을 적다 보니 꼭 야간 선생님뿐만 아니라, 각 반의 담임, 강사들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직원들이 비슷한 입장이다. 나는 그런 선생님들을 조교가 되어 다른 관점에서 만나게 됐고 밤낮을 가리지 않던 활동성 덕분에 자연스럽게 많이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각설하고, 직원 숙소에서 마주친 야간 선생님들이 웬일로 점심을 먹으러 가신단다. 오늘 특제 메뉴가 있다고? 학교나 직장에서 급식을 먹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의 메뉴 파악하기 아닐까? 출근 후 잠깐 하루의 지루함을 날릴 수 있는 작은 이벤트, 그것은 점심메뉴 확인이다. 선생님들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오늘 메뉴가 스페셜 안주감이라서 퇴근 후 대낮에 막걸리를 한 잔 하신단다. 사감 실장님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상남아, 막걸리 한 잔 같이 어때?"
"어우 좋죠!"
한창 술에 눈을 뜨던 시기였으니 거절할리가 없다. 푹 자고 비번인 아침 컨디션이 유독 상쾌하다. 그렇게 한 배를 타 1층 식당에서 열심히 음식들을 챙겨 와 직원 숙소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메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작고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걸쭉하게 막걸리를 들이켠다. 몇 잔 드신 한 선생님이 갑자기 내게 말했다.
"자상남아, 뭘 좀 하면 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까? 우리가 뭘 해줘야 할까? 좋은 생각 없냐?"
그랬더니 옆에 사감 실장님이 말했다.
"에이, 그런 건 밤에 제대로 한 잔 사주면서 얘기해야지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하면 어쩌나? 허허허"
"아 그렇긴 한데, 자상남은 학생이었다가 바로 선생님이 됐으니까 잘 알 것 같아서요. 하하"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야간 일을 하면서 돈과 시간을 벌어 늦은 시험공부나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 아니었나? 아니면 세상이 다 그렇듯, 그저 적성엔 안 맞으나 직장을 잡아먹고 살아가기 위해 이 학원에 온 것은 아니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를 들으며 쳐다본 선생님의 눈 속의 생각은 단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다. 학생들과 접점도 없고 학생들에게 별로 관심도 없을 것 같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정답지 없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그때 배웠다. 어쩌면 저 선생님들이 우리 학생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편견이요, 오만함이었던 것임을. 물론, 그중에는 정말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아르바이트로 여기고 일에 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진심 어린 사명감으로 일에 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어린 나는 간과했다. 오로지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과 학벌 그리고 경쟁에 파묻혀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고 색안경을 끼며 교만한 자세에서 인격체를 대하진 않았을까.
내가 '조교'임에도 열정을 다해 새벽까지 교재를 만들고 수업준비를 했고, 모르는 문제를 다른 조교들과 돌려 풀어보며 더 나은 수학 풀이과정을 개발한 사실을 다른 사람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내 숭고한 노력과 가치를 타인이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머리가 조금 커진 지금, 그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내가 겪어보지 않고 가늠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를 함부로 판단하고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사명감과 철학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주위에 많겠지만 적어도 인간관계를 개시할 때 사람들에게 편견 없이 다가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때의 그 선생님들이 정말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그때 내가 느낀 충격과 성찰은 진심이었으니까. 지금 내가 가진 이 교훈은 한평생 살아가는 데 좋은 철학이 되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어린 시절 나는 한 발자국 성장했다.
누구에게나 철학이 있다. 배워나가 보자. 그리고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씩 느껴보자. 큰 영감을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