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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Jan 14. 2024

고마운 선생님과 그렇지 않은 선생님

2010년, 2013년 그리고 2024년

선생님 한 분이 기억나 글을 쓰려고 한다. 박 선생님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기숙학원에서 대입 재수를 하던 때였다. 처음 그 선생님은 입시담임이 아니었고, 주간에 학생관리와 행정을 겸했던 것 같다. 엄격했던 면학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쉬는 시간에도 선생님들은 각자 맡은 공간들을 돌며 각종 규정을 적용했다. 상점과 벌점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는데 특이하게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열심히 공부해 코피를 흘리면 그것을 인증(?)하면 상점을 받았다. 박 선생님은 매의 눈처럼 그런 학생들을 발견해 조용히 반별 상점에 체크했다. 몇 개월이 지나 한 반의 입시담임으로 전직했고, 동시에 우리 반 부담임을 해주셨다. 부담임의 역할은 해당 반의 담임이 휴무일 경우 식사이동과 자습감독, 저녁점호를 대신해 주는 것이었다.


2009년 우리 반의 분위기는 엄격하기로 소문난 기숙학원 내에서도 엄했다. 하지만 모든 곳에는 나름의 생존방식이 생겨난다고 했던가. 시나브로 수험생들은 신기하게도 담임 선생님의 휴일을 꿰뚫게 된다. 그렇게 담임 선생님의 휴일에는 우리끼리 만세를 소리 없이 외치며 단 하루의 달콤한 우리만의 자유, 심리적인 휴일을 느낀다. 그런 심리를 모를 리 없는 박 선생님께서도 분위기를 맞추어 주셨다. 간혹 우리 반에 들어오셔서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입시에 관한 정보도 공유하며 우리 반과 친분을 쌓았다. 


2010년 초 내 인생 첫 사회생활이자 처음 수학조교를 담당했던 반에서 박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불과 내 기숙학원 생활이 끝난 지 2달이 채 안 됐을 때다. 5주간 호흡을 맞춘다.


수험생의 수험생활의 끝은 언제인가? 바로 대학의 합격증이 나오는 순간이다. 대부분은 수능이 끝나면 해방을 만끽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된다. 내 경우엔 정시 추가합격의 접전까지 가면서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 마음을 졸였다. 수험생에겐 치열한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요, 대학 합격을 위한 인고의 시간 또한 감내해야 할 수험생활의 일부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견디고 또 견디라는 말을 실감했다.


내가 내 모교와 같은 기숙학원에서 수학조교로 자청하고 일을 시작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막연하고 두려운 기다림의 시간을 유익하게, 이왕이면 재미있게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의 시간은 내 젊음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휴식시간이어야 했다.


선생님과의 만남을 설명하느라 서론이 길었다. 


일을 하며 나의 입시가 코앞에 닥쳤을 때다. 윈터스쿨 중인 학원 중앙홀 벽면에는 여전히 우리 기수의 '빌보드'(주: 학원 내의 경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문이과 성적 TOP 50 리스트, 보통 하트모양 안에 이름을 적어 벽에 붙여놓음)가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당연히, 우리 반 아이들뿐만 아니라, 학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오며 가며 심심풀이 땅콩으로 빌보드를 쳐다보게 되었고, 만일 자기 반의 수학조교가 전년도 수험생이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을 찾아 괜한 반가운 감탄사가 나온다. 오오오 저 위에 있네! 하지만 문제는 그때 벽에 걸려있던 빌보드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학생들이 수능을 치르기 위해 학원을 퇴소하면서 기념으로 자기 이름표를 떼갔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고로, 빌보드상에 붙어있던 이름표는 이제 없다.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 학생들 몇 명과 밥을 먹고 우연히 빌보드 앞에서 멈춰 서서 나의 재수이야기를 들려주며 짧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당시 학원 상담실장님이 등장해 우리에게 웃음기 있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


"너네들 그거 아냐? 예전에 자상남은 맨날 요오기 있었다? 요오기"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대략 빌보드 순위 50에서 약 3, 40등 정도 되는 부분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첫째로는 나는 그 상담실장님이 누군지 잘 모른다. 재수가 끝날 즈음 행정실에 출근하는 것을 잠깐 봤을 뿐이고 교류도 없었다. 그러므로 내 성적이 어떤지, 나란 사람은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지 수학조교로 일을 하면서 교무실에서 마주치며 인사를 드렸으니까. 둘째, 정보가 잘못됐다. 성적에 기복이 있었으나 나는 대략 10위 권 부근에 자주 있었고 수능 성적도 원내 14등이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분위기를 올리려고 한 언행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상대방이 기분 나쁘다면 그것은 재치나 유머가 아니다. 반대로 나를 낮추거나 상대방을 높이면서 분위기를 위트 있게 만들 수 있다면 수준 높은 유머이리라. 


왠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재미있게 대화를 주도하기 위해 나를 희생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괜히 얼굴 붉히기 싫어 아이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답했다.


"에이 아니에요. 항상 그렇지는 않았어요. 선생님도 참"


어쩌면 감정은 상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반응할 필요 없이 대수롭지 않게 넘길 법했다. 내가 정말로 기분이 상했던 까닭은 나이차가 거의 나지 않는 우리 반 학생들에게 왠지 선생으로서의 권위가 깎일까 저어 됐기 때문이다. 5주간 꼼짝없이 공부에 몰입하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던 학생들에게 곧 대학생이 될 자기 반 수학조교는 동경의 대상이자 유일한 안식처다. 가끔은 친구처럼, 가끔은 정말 거대해 보이는 어떠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경외감과 친근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진짜 강사와는 다른 매력이었다. 


이 첫 번째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해프닝으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담실장님의 어처구니없는 언사가 다시 이어지며 기억에 오래 남게 됐다. 정말 민감하면서도 당시 내 감정을 크게 상하게 만든 상황이 생겼다. 2010년 1월이 넘어가며 20여 명의 수학조교들 중 이과 출신 수학조교들이 속속 대학합격증을 받았다. 반면 나를 포함한 몇몇 문과 출신 수학조교들은 여전히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들어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대기번호를 받았다. 당혹스러웠다. 역시나 시험이 전년도에 비해 급격하게 쉬운 이른바 물수능이어서 성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상위권 점수대의 눈치작전이 치열했다. 그러다 보니 3개의 군 중 하나에서 하향지원을 하는 경향이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두려웠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윈터스쿨의 종료가 가까워오면서 걱정이 생겼다. 선생님들과 한 솥밥 먹던 수학조교들이 잘 될 거라고 힘내라고 말 한마디씩 걸어주었다. 고마웠다. 대학을 합격하는 것이 어찌 보면 철저한 분석과 전략 그리고 예측에 의한 것이라지만, 결국엔 천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원서를 제출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평정심과 주위 사람들이 보내주는 힘과 용기였다. 


정 선생님(재수시절 우리 반 담임선생님) 당연히 잘 될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이 원서를 작성하기 위해 멀리 고향에서 경기도까지 와서 밤을 새워가며 정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고 분석하여 최상의 시나리오로 원서를 제출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항상 웃고 다니고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다니고 활발하게 뛰어다니던 나였다. 그러던 내가 대기번호를 받고 풀이 죽어있으니 주변 선생님들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상담실장님도 다가와 한 마디 건넸다.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어유 자상남아 너는 S대 오버야... 넌 J대 썼어야 했어... 쯧쯧.. 기도나 해라"


이 한 마디에 나의 인내심은 무너져 내렸다. 본인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입시에 대한 지식으로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주었을지도 모르나, 사실 모든 주사위가 던져진 상태에서 그런 분석은 이제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한 번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입시결과를 기다리는 갓 21살이 된 철부지였을 뿐이다. 나에게는 그저 힘내라는 말과 위로의 한 마디, 그리고 함께 웃어 주는 친구들과 학생들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상담실장님은 그것도 '잘못된' 정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정 선생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상담실장님이 학생들 앞에서 괜히 나를 쪽팔리게 말했던 것, J대나 썼어야 했다던 이야기 등. 바로 그때 박 선생님께서 마침 우리가 있는 교실로 오셨다.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두 선생님께서는 분노했다. 과연 그 시점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았을까? 두 분의 데이터 분석 상으로는 현재 하향지원이라는 변수가 있어 내가 예상치 못한 대기번호를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나는 합격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박 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야 자상남아 너 걱정하지마, 무조건 S대는 붙어~. 아우 무슨 그 성적으로 J대야 J대는."


정말 단순했던 한 마디. "붙을 거야. J대는 무슨!" 하지만 당시 산산조각 난 내 마음에 등불과 같은 한 마디였으며 어느 누구보다도 큰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였다. 그리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주시면서 말씀해 주셨던 박 선생님.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 감사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너무나 간절했고 그 간절함에 힘을 실어주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상담실장님과의 대조로 더더욱 박 선생님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서 커져버렸다. 


박 선생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바로 이것이다.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 마치 히딩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박지성 선수에게 '될 거다'는 무심코 던진 한 마디를 히딩크 감독 본인은 잊고 있어도 당사자는 본인이 영국의 명문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던 인생의 한 마디가 되어준 것처럼.


2010년 2월 윈터스쿨이 끝나고도 나는 고향 같은 학원을 방문하며 박 선생님을 종종 찾아뵈었다. 비록 만날 때마다 "너 또 왔냐? 아 질린다 그만 좀 와라"고 츤데레 같은 투정을 부리셔도 "너는 진짜 학원에 취직해야 할 기세다 좀 가라"라고 매몰차게 말씀하셔도 나는 그것이 전혀 싫지 않고, 그 말 한마디에서 진심 어린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스승에 대한 나의 존경심과 감사함이다. 2013년 1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선생님께 이 내용을 말씀을 드렸다. 3년 만에 말씀드린 에피소드. 당연히 선생님은 기억을 못 하신다. 하지만 그 말씀 덕분에 그때의 내가 방향을 잃지 않고 작은 선생님으로서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어 감사했다고 말씀드렸다.


그 식사자리가 끝난 지 딱 11년이 지난 지금, 정 선생님이 참 보고 싶다. 정 선생님은 어느새 회사의 중역이 되어 같은 학원 다른 지점의 원장으로 또 다른 학생들을 용기의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선생님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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