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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Jun 11. 2020

이별을 준비하는 자세

벌써 10년이 지났다. 짧으면 5주, 길면 9개월을 만나 뜨겁게 공부했고,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었으며, 그 시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만남을 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처음 이 글을 엮을 땐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지속하고 있거나 그만둔 지 1-2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너무 소중한 추억인지라 잊어버리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가능한 기억이 남는 대로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 목표였던 글쓰기가 벌써 7-8년이 지났다. 이젠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31살이 되어 돌이켜보니 그때 그 시절은 단순히 좋은 사람 많이 만나 행복한 일을 하며 스스로 만족할만한 보람과 삶의 고독함이 채워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그 시간, 그때 그 사람들과의 소통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요체다. 내가 사람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형성한 중요한 경험 중 하나였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그러므로 향수가 느껴진다. 흐릿한 향기가 여전히 남은 '향수'통 같다. 


만남의 시작과 끝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그 과정에 담길 내 생각의 양과 깊이가 결정될 뿐이다. 어린 마음의 나는 시작은 늘 행복하기를 바랐고, 이별은 멀리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드는 모든 만남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랐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러한 만남들이 밀물처럼 생겨났다. 멘토링은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짧은 5주간의 첫 멘토링도 끝이 났다. 첫 기억이 아름답기에 평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기숙학원 우리 반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딱 그랬다. 모든 것이 즐거웠을 대학 입학 직전의 시점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짜릿함을 맛 본 나는 그 5주를 '불태우며' 일에 몰입했다. 그 안에서 만나는 약 30여 명의, 단지 두 살 어린 동생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 같다. 이별이 싫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지금처럼 누구나 쉽게 마음만큼 연락을 할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지금 학생들이 보면 낄낄거릴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은 없었고 여전히 학급 내 핸드폰이 없는 학생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 브런치에서 자주 언급한 내 첫 학급은 MF 반이다. 2009년 겨울부터 2010년 2월 초까지 함께했다. MF 반 학생들 중 내 기억에 많이 남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연락처가 계속 저장돼 마음만 먹으면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때 이후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공히 내 기억 속에는 생생히 남아있다. 그들은 나에게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주었다. 어떤 아이들은 질문을 자주 와서, 어떤 아이들은 나를 친형제 자매처럼 대해주어서, 어떤 아이들은 나를 무지 고생시켜서. 제각각 다른 이유이지만 나는 한 명 한 명에게 주고받는 정을 많이 느꼈다. 


그런 특별한 5주의 시간이 거의 지났을 무렵 예상치도 않게 우리 반이었던 정화가 일찍 퇴소한다고 했다.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목표로 적은 흰 머리띠를 두르고 열심히 야간 자율학습을 했던 정화. 내가 하던 수업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일리지 쌓듯 섭렵하고 늘 질문하고 웃으며 인사해주었던 '애제자' 중 한 명이었다.


'선생님'이 되어보니 체험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자상하고 열심히 하려 해도, 내 의식이 깨닫기도 전에 내 몸은 나를 더 찾아주고 있고 의지하는 친구들에게 좀 더 많은 열정을 쏟게 된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일에 너무 집중을 한 나머지 스스로 정한 원칙들을 고집했다. 편애라고 말하기 죽기보다 더 싫어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초등학교 시절 편애하는 선생들을 많이 보았는데 특별히 내가 피해를 보진 않았지만 그 모습들이 대단히 부적절해 보였다. 


한 편으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작은 편애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서 완전히 독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차별하지 않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괜찮은 듯하다. 


'애제자'들과 함께할 때 나는 더 큰 보람과 재미를 느끼곤 했다. 그들이 필요에 의해 나를 찾든 혹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나에게 의지했든, 나에게는 그 자체로 나의 존재가치를 높여주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존재들이었다. 반대로, 내가 그 기대에 발맞추어 무언가 더 주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본인들도 그것을 또 자연스럽게 느끼고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는 선순환 구조를 띄었다.


정화는 약 30명의 우리 반 아이들 중에 바로 그런 한 명이었다. 시간이 지나 약 5주간의 꿈같은 기숙생활을 마쳐갈 무렵이었다. 이별의 시간이 온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기도 광주시 무갑산 골짜기로 부모님들이 속속 아이들을 데리러 모였다. 그런 줄 모르고 한참 바쁘게 일하고 있던 내게 정화가 불쑥 찾아와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간의 수고에 대한 짧은 치하와 앞으로 있을 수험생활에 대한 격려를 담은 짧은 글귀의 쪽지를 건넸다. 그리고 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학사 일정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며칠 일찍 퇴소했다. 우리 반 첫 퇴소자다 보니 학급 내 분위기가 다소 싱숭생숭해진 듯했다. 당연히 같은 반 아이들끼리도 정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지간한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가장 힘들게 공부했고, 그래서 그 주변 친구들에게 서로 강렬하게 의지했을 것이다. 학원에서의 마지막 저녁밥을 먹고 주섬주섬 짐을 챙긴 정화가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나누더니 돌아다니는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로비 정중앙에 섰다. 정화 어머님이 깜깜한 밤을 헤치고 그리운 딸을 만나러 멀리 전주에서 오셨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로비에 서서 정화와 짧은 대화를 나누며 어머님이 도착하시길 기다렸다. 5분 정도 지나자 어머님이 반가운 얼굴로 학원으로 들어오셨다. 이산가족 상봉을 하듯 모자가 만났다. 5주 동안 떨어져 있었던 딸을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둘은 서로를 부둥켜 끌어안고는 이곳저곳을 훑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이어 나는 정화 어머님과 인사를 나눈다.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질 때가 되었다. 이제는 떠나야 한다. 그때 정화가 어머님께 말한다.


"엄마, 우리 조교 선생님 멋있지? 우리 쌤 서강대랑 성균관대 지원했다? 대단하지?"


"우와! 그러게"


"나도 꼭 조교쌤처럼 될 거야 히히히"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째는 내 아픈 곳을 찔러서이고, 둘 째는 고마움이었다. 내 아픈 곳을 찔렀다는 것은 내 대입 결과가 추가합격권에 들어가면서 발표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일하는 것이 재미있어 입시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전혀 초조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우리 반 아이들 앞에서 가장 미안했던 부분이 바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완전한 롤모델이 되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이과 출신 조교들의 입시는 빨리 끝났고 문과 조교들은 대부분 추가합격권까지 갔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과 욕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좀 더 당당하고 더 좋은 모습으로 다가가지 못했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더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지 못한 것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런 핸디캡이 있어 더 많은 사랑과 열정을 쏟았을 수도 있겠다. 고맙다고 생각한 것은 그런 나를 "우리 조교선생님이 최고야", "나도 조교선생님처럼 될 거야"라고 자랑삼아 얘기해주고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되어주고 싶었던 것; '목표와 비전을 심어주자'는 내 미션이 성공한 것 같다는 데에서 오는 감사함과 안도감이 들었다.


5주간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정화가 집으로 되돌아갔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강타했다. 나와 함께 공부한 것처럼 그렇게 뜨겁게 공부해줄 수 있을까. 1년간 저 힘든 수험생활을 잘 보낼 수 있을까. 내가 좀 더 많이 해줄 걸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드는 미안함도 밀려들었다. 한 명 한 명 보내는 것도 이리 아쉽고 공허한데 다가올 종강은 어지 감당할는지. 당시 어린 나는 이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별에 대한 나의 자세를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것도 내 성장의 일부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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