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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Mar 15. 2019

한 소녀의 변신

큰 물에 나가봐야 하는 이유

다이나믹 듀오 - 봉제선, Youtube


지금으로부터 7-8 전에 윈터스쿨을 다니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우리 반 학생은 아니었고, 이래저래 질문을 받고 자습 감독을 하면서 드나들던 옆동네 예비 고3 반의 학생이었다. 나는 늘 우리 반 학생들에게 충실히 일을 했지만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진 다른 반 학생들이 다가오는 것을 일절 막지는 않았다.


그렇게 친해졌던 한 학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전라도 구례 출신으로, 먼 길 올라와 방학을 이용해 '고3 혁명'을 노렸던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많은 윈터스쿨 동안 학생들은 지옥 같은 5주간의 트레이닝을 버텨낸다. 그 결과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도 하고, 달콤한 자유와 휴식을 만끽할 생각에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학원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하면 이어갈지 고심하며 열정을 불태우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했을지라도 사람마다 느끼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정도는 천양지차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미소를 잃지 않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장의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서도 다가올 고3 수험생활에 대한 막막한 걱정을 동시에 지니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를 것이다. 


종강을 하고 시간이 몇 개월이 흘렀다.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어떤 아이들은 먼저 연락을 해주기도 하고, 어떠한 때에는 평가원과 같은 큰 시험을 계기로 몇 개월 만에 겸사겸사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십, 수백 명이 그 시절 나와 동고동락했지만 서로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 같다. 그리고는 내 곁에는 남을 사람들만 남게 된다. 그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것이고 내게는 감사한 일이다.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비슷한 계기로 나는 그녀와 통화를 했다. 유독 긍정적이고 웃음기 넘치는 윈터스쿨 때의 모습과는 달리, 수화기 너머 그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에는 힘이 쭈욱 빠져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 말라비틀어진 한 포기 풀처럼. 


이런저런 안부를 서로 묻고 그녀는 힘없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 꼭 서울에 가야 할까요?" 


내가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왕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에 가면 좋지. 다양한 경험도 하고, 넓은 세상에서 재밌게 놀아보고."


"공부가 너무 힘들어요. 꼭 그렇게 해서 서울에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실 틀린 말 없다. 서울에 좋은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하냐? 좋은 직업을 무조건 구하느냐?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정해지는 것은 없으며, 본인이 하기 나름일 것이라고.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기며,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맹점이 있다. 시골에서 지내다 서울에 가면 그만큼 얻는 것이 많다. 학벌에 대한 사람들의 강박관념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서울에 가면 그만큼 본인의 노력에 상관없이 기회가 훨씬 많이 주어지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만나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학생으로서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선택지를 넓히는 것이 임무고, 그 후에 서울에 갈지 지방에서 지낼지를 선택하면 된다. 선택지를 가지지도 못한 채 그 선택지를 택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안타까운 변명처럼 메아리칠 뿐이다. 


고3이기에 힘든 시기를 보내는 것은 공감되지만 유독 긍정적이었던 그녀 맥 빠진 한마디에 나도 말문이 닫혀버렸다. 그녀가 정말 포기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단순히 힘이 들어 말을 내뱉은 걸까. 아니면 성적이 지지부진하게 나와 여느 학생들처럼 스스로의 가능성을 묶어버린 것일까. 듣는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평소였으면 침을 튀겨가며 동기부여를 위해 여러 이야기를 아낌없이 해주곤 했던 나는, 이번에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고는 통화를 마쳤다. 어쩌면 그녀는 정답을 얻는 것보다 그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뱉는 것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나는 내심 실망스러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검은 막을 내 머리 위로 뒤집어쓴 것 같이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약 일 년이 흘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입시를 마치고 새내기 신입생으로서 한창 자유를 누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녀다. 정말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선생님 잘 지내세요?" 


"어어, 오랜만이네!"


"저 경희대 간호학과 수시로 합격했어요!"



띠용? 정말 당시 수시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합격한 사람은 자기가 왜 합격했는지 잘 모르고, 떨어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당시 수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 소녀는 다행스럽게도 수시에서 좋은 결과를 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생각지도 않은 대박이 났다고 했다. 공부가 너무 힘이 들어 서울에 안 가도 된다라고 말했던 그녀가 당당히 서울에 입성해 명문 대학의 학생증을 거머쥔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 진짜 서울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크크크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진짜 너무 재밌고 모든 게 다 신기해요. 진짜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렇다. 어느 대학생활이 재미가 없겠느냐만, 사람들이 박을 싸매고 경쟁을 해서 좋은 대학을 가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대학 생활 어때요?"라는 질문에 답을 해줄 때마다 늘 가장 먼저 이야기했던 것이 바로 재미다. 일단 재밌다. 그 재미의 원천은 물론 서울의 먹거리, 문화생활, 캠퍼스 라이프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처절한 노력에 대한 자유의 달콤함이 아닐까? 그녀의 결과가 좋아 만족스러워하니 듣는 나도 신이 났다. 불과 반년 전 포기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던 과거의 그녀의 모습은 온 데 간데없었다. 


그녀의 변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년 즈음 다시 지나 그녀는 갑자기 세계일주를 떠났다. 동남아부터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네팔을 거치더니 세계 곳곳을 다녔다. 어디 여행 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정말 영화 같은 스토리다. 수험생활 힘이 들어 서울에 갈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했던 그 학생이, 자신의 표현대로 '대박'이 나서 서울에 입성하였고, 그곳에서 새로운 배움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가치관이 새롭게 형성되어 가면서 이젠 세계로 뻗어나가는 그 모습. 정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경험과 터닝포인트가 중요한 것이구나. 다시 한번 그녀를 통해 떠올렸다.


그녀는 거침없는 활보를 계속했다. 지금은 가끔 SNS를 통해 그녀의 근황을 '눈팅'할 뿐이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자신만의 그림을 여전히 그려나가는 듯하다.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하는 어떠한 단체를 맡아 운영도 했다. 얼마 전 그녀는 대학을 졸업했다. 시간이 참 빠르다.


그녀의 변신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정말 인생은 한 치 앞을 보기 힘들다. 새옹지마다. 자신 없는 그녀의 모습이 어느새 누구보다도 더 빛나는 모습으로 변신해 가는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게 이젠 역으로 귀감이 되어주고도 있다. 아직까지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수험생들에게 이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전해주고 싶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길에 들어선 이상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대단히 많다. 그것이 유일한 것이라서, 지금의 미션이어서, 자유가 기다리고 있어서 등등. 힘든 시기에도 열심히 하며 버텨낼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찬란한 미래가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 기회와 가능성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기대되지 않는가? 그 가능성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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