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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Feb 27. 2019

진퇴양난의 진학상담 어찌하리오?

사람 기억(2)

나는 종종 몇몇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진학상담을 하기도 했다. 처음은 조교로 일하던 첫 해였고, 가장 최근은 지난해 지인의 동생을 도와주면서다. 진학상담은 사실 공개된 데이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당사자의 성적을 비교해 전략을 짜는 것이다. 그 전략이란, 다양한 전형 중 자신에게 최적화된 전형을 찾는 것에서 시작해 치열한 눈치작전으로 마지막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입시에는 100%가 없다. 모든 정보는 과거를 기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올해도 비슷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진행하는 정보수집이기에 누구도 확정할 수 없다. 마지막 선택은 결국 학생과 학부모의 가치관 정립과 선택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진학상담을 많은 사람들이 마치 로또인 양 불확실성이 큰 것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가 어떻게 데이터를 모았고, 어떻게 분석했으며, 최종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했고, 선택할 것을 권장했는지 적어보겠다. 


나는 부분적으로 내 입시를 위해 축적하고 분석했던 데이터와 어깨너머로 들은 재수시절 우리 반 친구들의 대략적인 전국 순위(백분율)와 결과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대단히 제한적이다. 그런 내가 진학상담을 할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윈터스쿨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가는 초 겨울에 5주간 학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입시상담의 주된 타깃은 아니다만, 지방에 있는 학생들은 수능 시험을 마치고 학원에 진학상담을 의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학교와 별도로 대기업인 학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지혜로운 선택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의뢰는 어색함을 타파하고자 나를 통해 연결되거나, 옛 윈터스쿨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상담이 가능했다. 우리 반 아이들도 박 선생님께 배치상담을 꽤 받았다고 했다.


2010년이 마무리되던 겨울이었다. 모 광역시의 외고를 다니던 한 학생의 전화를 받았다. 그 아이는 윈터스쿨에서 함께 공부했던 아이다. 수능성적이 나오고 학교에서의 배치 상담을 마친 후 안부차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여보세요? 형, 잘 지내세요?"


모처럼의 목소리가 참 정겹다. 지난 9개월 간 힘겹게 공부했을 이 학생과 참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무사히 수능을 치렀다고 했다. 나는 이 친구를 잘 기억한다. 내가 수학 수업을 진행하며 몇 개의 고난도 문제에 대해 토론식으로 학생들과 함께 푼 적이 있었다. 그때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풀이 방법을 칠판에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의 입시제도는 전년도에 비해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안부를 묻던 그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것이다. 평가원에서 성적을 발표한 후 학교에서 배치상담을 받은 이야기를 했다.  


2011 수능은 전년도에 비해 난이도가 쉬운 이른바 '물수능'이었다. 물수능의 경향이 짙어지면 대다수 학생들은 대학원서를 작성할 때에 하향지원을 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현역이었던 09 수능이 갑작스레 어려워졌다가, 다시 10 수능에서 난이도가 크게 떨어졌는데, 그보다도 더 떨어진 시험이 11 수능이었다. 하향지원의 경향은 시험의 변별력이 떨어져 점수대의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비슷한 점수대의 불안한 학생들이 안정적인 선택을 위해 특정 구간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변수가 늘어나면 결과를 예측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최상위권 대학의 몇몇 과들은 겁먹은 학생들이 기피해 오히려 지원자가 급격하게 줄어 많은 추가합격이 생기는 나는 이른바 '빵구'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입시는 참 아이러니하다. 심리학과에서 논문을 쓴다면 정말 흥미로운 논문이 나오지 않을까?


그가 내게 대략적인 수능점수를 알려줬다. 큰 틀이 비슷한 상황임을 감안했을 때 그의 점수는 명실상부 상위권의 점수였다. 서열화돼 있는 우리나라의 사정상 그의 점수 구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는 명문 대학군이라 짐작이 됐다. (비록 대학마다 과목별 점수 반영 비율이 달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고민이란, 지역 명문 외고 진학담당 선생님이 자신에게 훨씬 낮은 대학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그 대학은 그의 성적대에서는 대학의 레벨을 소위 2단계를 낮춰야 했다.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숙' 등 비공식적으로 서열화된 국내 대학에 대한 관례적 인식을 말합니다. 위 단어는 많은 입시설명회에서 언급되는 표현입니다) 즉, 점수가 남아도 너~무 남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물수능인지라 하향지원의 경향이 짙어 어쩔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안타까웠던 것은 그 학생은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원서를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 명의 대학생일 뿐인 내가, 침을 튀겨가며 수화기 너머로 말하는 내용은 이내 그 학생은 큰 고민에 빠졌다. 정말 이 말을 믿어도 될까?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데, 이 대학생의 말이 사실이면 자신은 큰 손해를 보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커다란 진로의 선택 앞에서 그는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 마음을 내가 모를 수가 없었다. 


"에이, 타인의 인생에 오지랖도 적당히 부려야지, 어떻게 감당하려고?"

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아니라면 중요한 선택 앞에서 '흘리는 듯한' 말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입장이다.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뿐 제대로 된 대안을 주는 것이 아닌 무책임한 언사가 될 수 있다.


찰나였지만 고민이 됐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노력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았으면 했다. 또, 단 5주를 만난 우리 반 학생이었지만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나는 우리 반 학생들이 나를 기억하든 말든, 나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짧은 시간, 내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와 데이터, 그리고 최종적인 소견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는 고민해보겠다고 답변했다.


이튿날 다시 그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 충분히 설명을 드렸는데, 많이 갈등을 하시더란다. 자신도 그러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공신력을 찾아 그것에 크게 의존한다. 학생에게 가장 큰 공신력은 학교와 소수의 대기업 학원이다. (*그들의 프로그램과 데이터는 개인과 학교에서도 사용하니 말이다)


내가 알려줄 것은 다 알려주었겠다, 나는 그에게 윈터스쿨 박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조언을 구하라고 했다. 대학생에게 부족한 공신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내 말에 용기를 얻은 그는 학원에 전화를 했고 무사히 진학상담을 받았다. 결과는 다행히 나와 일치하는 의견이었다. 사실, 어쩌면 당연하다. 있는 데이터를 분석해 의견을 냈으니, 큰 차이를 내는 학교선생님의 의견과는 다를 수밖에. 그와 그의 어머니는 학교가 아닌 학원의 의견을 따라 지원할 대학을 정했고, 내가 준 선택지에 따라 약간의 리스크를 가진 상위의 과냐, 안정적인 중하위의 과냐를 자율적으로 선택하기로 했다. 


결과는?


학생과 어머니는 안정적인 합격을 위해 리스크가 적은 과를 낮추어 지원했다. 내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선택이었지만, 이것이야 말로 최종적으로 남는 '가치관'의 영역이다. 최종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 '입시'이다. 놀랍게도 1차 우선선발에 합격했다. 즉, 점수가 약간 남아 해당 학과 지원자 중에서도 상위권에 포진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무사히 입시를 마무리했다.


위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대학입시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추정할 수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추정의 작업은 가능한 최대로 정교해야 한다. 만일 이 학생이 단순히 머릿속 논리에만 의존했거나, 학교식 배치 상담을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그의 노력에 대한 결실은 평가절하됐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본인 스스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야 한다. 그래야 비판적인 자세로 상담에 임할 수 있고, 건설적인 질문도 던질 수 있다. 이는 비단 입시만의 문제가 아닌 삶의 자세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자신의 성적보다 낮은 대학을 가면 인생이 망한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노력에 대한 열매를 정직하게 얻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그 외국어고등학교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큰 실책을 범할 뻔했다. 복잡한 상황과 논리를 분석해봐야 알겠지만, 이것이야 말로 공교육이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하나의 단면이 아닐까? (*이 글의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서 어설픈 가치판단은 하지 않겠다)


그가 나와 통화를 하고 겪었을 내적 갈등의 크기를 가끔 상상해본다. 기대와 걱정이 얼마나 많이 교차했을까. 과연 일개 대학생의 말을 믿어야 할까. 그래도 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낫지 않을까. 아마 나와 친분이 깊었던 그 학생보다, 학생의 어머니가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단지, 수험생이 겪을 수 있는 최종 갈등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은 밝히고 싶어 글로 엮어본다. 나는 그가 내게 보여준 한 번의 신뢰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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