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식
재수가 시작되었다. 이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단지, 고3 때의 기본 공부습관을 토대로 하루하루 공부를 해 나가보겠다 마음먹었을 뿐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한 번 대학입시를 실패한 이유이기도 했다. 2009년 2월 16일, 내 인생 변화의 한 획을 긋는 날이기도 했다. 약 9개월의 여정이 시작됐다.
새파란 체육복을 입고 반 배정을 받고 어색한 기숙사생활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이름조차 아직 다 외우지 못했다. 그때 학원 창립자이자 기업 회장님이 광주 기숙학원을 방문했다. 인터넷강의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사교육의 대명사로 통하는 유명인사를 직접 보니 연예인 보듯 무언가 신기했다.
학생들이 반 별로 방송 안내를 받아 강당으로 이동했다. 입소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살벌하고 어색한 면학 분위기가 연출되며 학원에는 적막함이 흘러 이동시 바스락 거리는 체육복 소리만 연신 날뿐이다. 이날 기숙학원 재수정규반 입소식이 거행됐다. 입소식이라. 그래도 조금은 특별하게 식을 준비한 모양이다. 원장님 이하 직원들, 강사들과 모든 원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오문 또는 가훈을 미리 세겨둔 흰 머리띠를 각자의 머리 위에 빙글 두르고 있었다. 대강당은 500여 명의 파랑, 보랏빛의 체육복들이 바둑반처럼 정렬해 반별로 남녀가 철저히 유별된 채 알록달록 물들어 있었다. 만약 바깥사람들이 보고 있었다면 얼마나 우스웠을까. 마치 드라마에서나 보일 법한 수험생의 모습이었다. 작은 책상 앞에서 머리띠를 매고 열심히 공부하는 이전 세대 고시생들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입소한 날 저녁부터 학생들은 이미 머리띠를 매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간단한 리허설을 마치고 우리는 침묵으로 회장님을 기다렸다.
드디어 회장님이 도착했다. 뜨거운 박수와 함께 강당 중앙으로 밝은 미소로 손을 연신 흔들며 입장한다. 정말 텔레비전, 인터넷 강의에서 보던 그 모습과 똑같다. 뭔가 대표이사라는 직책과는 별개로 굉장히 친근한 첫인상이었다. 보통은 원장님의 주재하에 그냥 끝내버 리기 일쑤일 텐데 입소식과 더불어 최근 입시에 관한 좋은 정보도 주신다더니 신설한 직영학원의 득을 보나 싶었다.
식이 거행되며 사전에 안내된 남녀 대표학생들이 단상으로 올라 회장님 앞에서 준비해 온 각오문을 마이크에 에 대고 낭독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남양주 기숙학원에서 재수를 마치고 갓 대학에 입학하는 입시 선배들이 줄줄이 왔다. 내가 입소했을 때가 남양주에 있던 원장님 이하 모든 선생님들이 광주로 이사를 와서 개원한 첫 해였기 때문에 선배들도 남양주 출신이 오게 되었다. 명문대에 들어간 선배들이 꽤 많이 입소식을 찾았다. 겨울이어서 두꺼운 파카를 입고 온 선배들. 이름은 모르지만 그들의 얼굴과 이야기, 입학하는 대학교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비약적으로 성적이 향상되어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한 선배가 대표로 후배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후에 우리 학원 첫 수학조교가 되어 주말마다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가끔 성공한 선배라고 심화반에 들러 수험생들을 격려해주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던 선배들이 있었다. 그때에는 그러려니 무언가 감흥이 좀 덜했었던 것 같다. 절실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이곳에서는 무언가 달랐다. 나와 같이 실패를 한 번 겪었던 사람, 그리고 그 숱한 고통의 과정을 인내하고 목표를 성취해 낸 사람의 말은 나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 식으로 선배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입소하는 학생들의 이야기, 선서 등 꽤 많은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작은 입시 설명회도 있었다. 두 시간 정도의 긴 입소식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입소식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1. 재수를 하면 정말 치열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2. 재수를 해서 성공을 해내야겠다는 각오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3. 나도 단상 위의 선배와 같은 선배가 되어 반드시 돌아오겠노라는 다짐
특히 선배들의 방문은 달랐다. 단상 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선배들 모습에서 마치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듯 거대해 보였다. 그들의 외모가 수려하고 옷차림이 화려해서? 아니다. 부러워서, 그들의 생생한 경험담에 감정이입이 돼서, 그래서 자연스레 롤모델처럼 됐기 때문에 동경의 눈빛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결심했다. 그 모습이 막연히 매우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나 또한 반드시 1년 후 수많은 체육복 앞 단상에 올라 저 위치에 서있겠노라고.
'재수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최고의 대학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단순무식한 생각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목표대학으로 설정하고 머리띠에 적어 내 머리에 둘렀다. 그때의 사진을 보니 꽤나 결연한 눈빛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있다.
나의 두번째 대학입시 수험생활이 공식 시작되었다. 입소식을 통해서 정식으로 나는 재수생의 신분이 됐다.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나 또한 저 단상에 반드시 오를 것이다, 반드시 이 자리에 금의환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