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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D May 25. 2021

이기는 보고, 지는 보고

아니 왜 제가 임원들 과외를 시켜줘야 하는 거예요.
나보다 월급도 몇 배 더 받으면서 왜 기본적인 것도 몰라요.


꽤 오래전 스마트홈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기획 보고를 준비하던 때였다. 그 당시 가전회사들이 제시하는 스마트홈의 구조적 문제점과 고객 인식, 고객 조사 내용과 데이터 분석 내용으로 보고서를 채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리더였던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무 어려워. 다시 쓰자.'


화가 났다. 누구를 위해 보고서를 쉽게 쓰라는 것인가? 좀 더 고객 입장에서 고민하고 치열하게 분석해도 모자랄 판에 쉽게 쓰자고? 그때 팀장님께서 말을 이었다. '너는 이 보고서를 왜 쓰고 있냐?' 갑자기 어리둥절 해졌다.


'너는,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제를 시작하고 싶어서, 허락받고 싶어서 이 보고 하는 거잖아. 기어서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더라도 허락을 받아내야 이기는 보고다. 자존심 세우다가 하지 말라고 의사 결정되면 그냥 지는 거야.'


그렇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무수히 많은 보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보고'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듯, 우리는 보고를 통해 상급자의 입에서 원하는 의사결정이 내려지기를 원한다. 그것이 보고의 본질적 목표다. 서글프지만 부인할 수 없다.


그때부터였을까? 이왕이면 이기는 보고를 준비하기로 했다. 아래에 나름대로 체득한 보고에서 이기는 법들을 적어본다.


1. 보고받는 사람을 나와 동일선상에 놓지 않는다.


입장을 살짝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보고를 받는 사람은 꽤 다양한 분야의 보고를 하루에도 몇 건씩 받아야 될 것이다. 몇 달 동안 그 프로젝트만 주구장창 고민했던 나 보다 그 분야에 관심도 배경지식도 낮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명료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이기는 보고의 기본이 된다.


이런 마음가짐은 PT를 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타입에게도 꽤 도움이 된다. 상대보다 내가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있다는 자신감은 떨리는 목소리를 잡아주는 힘이 있다. 나도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 반드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보고 받는 분들을 가르치려 드는 식의 표현이나 말투는 금해야 한다. 그들은 높은 확률로 산전수전 다 겪은 업계 경력 수십 년의 임원들이다. 자존심 건드려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순간 그날 보고는 망한다.


2. 이왕이면 다홍치마


프레젠테이션은 보통 자료를 띄워놓고 그것을 함께 보면서 진행된다. 시각은 인간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감각기관이다. 따라서 시각언어를 적절히 사용하면 보고를 받는 사람의 시각적 피로는 줄여주는 동시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도움일 된다. 기본적인 보고 레이아웃의 정리, 오탈자 수정, 색상의 일관된 사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pagination에도 민감한 임원들이 많으니 신경 써서 작성하면 좋다.


가끔 이 부분을 예쁘게 만드는 것으로 착각해서 현란한 Art Work과 애니메이션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경험상 높은 확률로 부정적 코멘트가 나왔다. 결국 레벨을 맞추는 것이 관건인데, 나 같은 경우 좋은 피드백을 받은 보고서를 선배에게 부탁해서 받고, 템플릿 삼아 수정해서 사용하곤 했다. 이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3. 프레젠테이션은 결국 듣는 것


보고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오직 보고자의 목소리로만 채워진다. 중간중간 몇몇 코멘트와 질문이 더해지긴 하지만, 수십 분에서 길면 몇 시간을 끌고 나가야 하는 것은 보고자의 말이다. 그리고 말하는 당사자가 제일 먼저 안다. '잘되고 있다' 아니면 '아 말렸다.'


말리지 않고 보고를 이끌고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계가 숙달이다. 여러 번 쉐도우 복싱을 해서 말의 시적점과 끝점, 문서를 넘기는 타이밍, 강조할 부분, 힘을 줘서 언급해야 할 것들 등을 체크하면 좋다. 특히, 사람마다 자주 사용하는 말버릇이 있기 마련인데, 긴장하면 더 사용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 '~ 하는 지점입니다.'라는 말투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연습 단계에서 알게 됐고, 이 말을 다른 표현들로 변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고 한번 하는데 뭘 이렇게 까지 하나 싶을 수 있다. 나도 그랬다. 좋든 싫든 우리는 회사뿐 아니라 살면서 수많은 곳에서 '보고'를 하게 된다.

우리는 왜 보고를 하는가? 무엇을 얻기 위함인가?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는가?

영리한 조직생활을 위해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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