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을 달리다
선풍기가 꺼졌다. 천장에 실링팬, 창문에 서큘레이터, 그리고 두당 한 대씩 총 다섯 대의 선풍기가 밤낮없이 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일제히 휴식 모드에 들어갔다.
한참 산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등산의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정상에 섰을 때도 아니고, 정상 찍고 내려올 때도 아니고, 다 내려와서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들이켤 때도 아니다. 그 순간은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 30분에서 1시간쯤 지났을 무렵,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조용히 찾아온다.
등산의 고비는 참 빨리도 온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벌써부터 숨이 헉헉 차오르고, 아직 본격적인 오르막길도 아닌데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고, 심장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괜히 왔네, 그냥 내려갈까, 속에서는 마음 약한 소리들이 아우성치고 몸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한 줄기의 바람이 조용히 밑천을 드러낸 정직한 몸을 관통한다. 마법 같은 바람이다. 곧 터져나갈 듯 날뛰던 심장 박동이 잔잔해지고 팔다리가 가볍다. 비로소 내 몸이 산에 적응하여 몸에 리드미컬한 에너지가 생성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라도 신은 것처럼 몸이 붕 떠오른다. 달리기로 치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비슷한 쾌감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러너스 하이’가 있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선풍기는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고, 하루에 몇 번씩 샤워해도 몸은 불덩이 같고, 밤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에어컨을 사야 하나 인내가 바닥날 무렵 그 시간이 오는데 더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33도까지는 덥다고 느끼지 않고, 어제보다 1도만 낮아져도 시원하게 느끼고, 저녁에 30도 아래로 떨어지기만 해도 선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더위 잘 참는 나는 그렇다 치고 더위 많이 타는 남편이 어젯밤 밤공기가 쌀쌀하다면서 창문을 닫고 자는 걸 보고 이제 정점은 지난 것을 실감했다. 풀가동하던 선풍기가 하나둘 꺼지고 밤에 창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에어컨 소리는 쏙 들어갔다.
우리는 37도에 육박하는 한여름을 뜨겁게 달리다 보니 러너스 하이를 맛보았다. 여전히 30도를 육박하고, 늦더위가 뒤통수를 치겠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걸 보면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더위는 정점을 찍었고,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