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여행이란
2018년 퇴사하고 딸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막연하게 언젠가 한 번쯤 딸과 배낭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긴 했지만, 그 때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그 가능성을 본 것은 딸 아이 열살, 초등학교 2학년때 갔던 태국 여행에서였다.
10여 년 전 나는 혼자 한 달간 태국 여행을 했다. 그 이후 방콕은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 Top 10 상위권에 늘 랭크되어있는 도시여서 언젠가 가족들과도 함께 가보고 싶었다. 마침 추석 연휴가 일주일, 그동안 못 썼던 연가도 붙이면 보름 정도의 휴가가 생겨서 이 때다 싶었다. 방콕에서 5일간 남편과 휴가를 보낸 후 남편은 먼저 들어가고, 나와 딸은 남아서 태국 북부를 여행했다.
나는 가난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혼자서 여행할 땐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고, 스트리트 푸드를 주로 먹으면서 쏘다닌다.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딸과 남편이 호텔을 너무 사랑하신다. 딸은 호텔의 하얀 침대 시트+호텔 조식 뷔페+ 호텔 수영장 3종 세트를 너무도 사랑하신다.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니까 어느 정도 가족들의 취향도 고려해서 고급 호텔에서 자고, 호텔 루프탑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편안하고 쾌적한 여행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이번 태국 여행의 백미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짐 톰슨 하우스(Jim Thompson House)를 가려고 클롱 샌샙 강(Khlomg Saen Saep River) 보트 선착장으로 갔다. 방콕에서는 보통 택시나 툭툭으로 이동하지만, 방콕 트래픽이 워낙 심하기도 하고 우리가 가려던 곳이 보트 선착장 옆에 있어서 운하 보트를 타기로 했다. 보트는 현지인들의 교통수단으로 우리 같은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장점은 싸고 빠르다는 것이고, 단점은 더럽고 시끄럽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경 좀 하려고 배 바깥쪽에 앉았다. 우리가 앉은 자리와 수면이 같은 높이여서 쓸 데없이 물의 상태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한 마디로 똥물이었다. 운하 옆에 가정집의 하수가 그대로 강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좀 더럽다는 의미에서 똥물이 아니라 진짜 똥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가득 찼고, 배가 출발했다. 생각보다 시끄럽고 생각보다 빨랐다. 빠른 만큼 물살이 거세게 일어났다. 반대편에서 배가 오면 어쩌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진짜로 배가 나타났다. 좁은 운하에 두 배가 가까이 붙어 교차하게 생겼다. 우리는 하필 바깥쪽에 앉아 있었다. 비위가 약하지 않은 나지만 똥물을 뒤집어쓰기는 싫었다. 워낙 만원 버스여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똥물을 뒤집어쓸지언정 우리 귀한 딸은 보호해야겠다 싶어서 아이를 감싸면서 에스코트하고 있는데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비닐로 된 발이 올라왔다. 바깥쪽에 앉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 줄을 힘껏 잡아당기면 비닐로 된 발을 올라와 똥물이 튀는 것을 막아주었다. 똥물 방지 셀프서비스였던 거다. (포장마차에 드리워진 비닐과 비슷) 똥물 뒤집어쓰는 것은 피했지만 순식간에 배가 비닐하우스, 아니 습하고 더운 찜통이 됐다.
반대편에서 배가 올 때마다 바깥에 앉은 사람들은 손잡이를 재빨리 잡아당겨서 똥물을 막아야 한다. 배의 안쪽부터 자리가 찼던 것은 이 번거로운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한 거였다. 근데 우리 딸은 이 보트가 너무 재밌다면서 그 손잡이를 꼭 부여 잡고 똥물이 튀어오르기만을 기다렸다. 똥물이 튀어 오르면 무슨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꺄르륵거리며 즐거워했다. 점점 용감해져서 안전 방어보다는 아슬아슬하게 줄을 잡아 당기며 스릴을 즐기 있었다. 얼마나 재밌었는지 딸이 또 타고 싶다고 졸라대서 놀이기구 타러 가듯 똥물 보트를 타러 갔다.
이번 태국 여행에서 ‘똥물 보트’처럼 강렬했던 기억은 없다. 딸에게 기억나는 거, 재미있는 것을 꼽으라면 수영 다음으로 바로 똥물 보트가 나온다. 그 화려한 왕궁, 왓트, 시장, 아쿠아리움, 동물원보다 앞선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여행의 즐거움이 쾌적하고 안락한 것에만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연성, 즉흥성, 의외성, 불편함, 비일상성에서 오는 뜻밖의 경험을 좋아하는 걸 보니 딸과 내가 좋은 여행 친구가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