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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Aug 27. 2021

sleeping, but sleepless

방콕에서 치앙마이 가는 기차에서

우리는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툭툭을 타고 후알람퐁 기차역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남편은 한국으로 먼저 들어가고, 나와 딸은 치앙마이로 가기 위해 밤기차를 탔다.      


나는 침대 기차 타는 걸 좋아한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rocking 효과 때문인지 미치도록 잠이 잘 온다. 특히 여행 중에는 피곤해서 그런지 적당한 소음, 적당한 불안, 적당한 편안함에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설렘까지 더해져 꿀잠이 완성된다. 어린 딸과 함께 다니려니 혼자 다닐 때보다 아무래도 안전과 청결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10년 전에 방콕에서 푸껫을 가면서 침대 기차를 탄 적이 있는데, 유럽 침대 기차에 비해 훨씬 안전하고 쾌적하고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안심하고 기차를 탔다.


기차 탄 뒤 한 시간쯤 지나자 승무원들이 일제히 나타나서 의자를 펴고 그 위에 매트를 깔아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그 위에 하얀 침대 시트를 깔고, 그 위에 비닐에 깔끔하게 포장된 베개와 이불을 놓고, 복도 쪽에 커튼을 다니까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어린아이가 있으니 승무원이 딸에게 말도 걸고(말 이래 봤자, where are you from? how old are you?이지만) 웰컴 드링크에 주스에 사탕도 챙겨주고,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딸이 2층에서 자겠다고 했다. 힝, 나도 2층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만 딸에게 양보하고, 나는 1층에 누웠다. 앞으로 딸과 단둘이 여행할 생각을 하니 기대도 되고, 나 혼자 딸을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도 되고 그랬다. 누워있으니까 피로가 몰려오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자는 사이 누가 우리 딸을 데려가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배낭여행할 때 비상시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로프를 딸의 발에 묶고 줄을 창가 쪽으로 내려 내 발에 묶었다. 그런데도 안심이 되지 않아 자기 전까지는 2층에서 놀다가 잘 때는 1층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우기 끝이어서 그런지 비가 말 그대로 억수로 쏟아졌다. 기차 천정은 양철인 건지 소리가 요란했고, 천정이 뚫어질 것 같았다. 창문에 코를 붙이고 창밖을 내다 보았다. 어스름이 짙은 가운데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은 열대우림이라도 지나는지 숲이 우거져 있었고, 키 큰 나무들이 위협적으로 휘청거렸다. (이게 무슨 느낌이냐면 자동세차 터널 인에 들어갔을 때 고압수의 광포한 물줄기와 캉캉 치마 같은 거대한 걸레 더미가 덮쳐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비도 쏟아지고, 잠이 쏟아졌다. 자면서도 몸이 무겁고, 축축하고, 뭔가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엄마, 물, 물이 있어.”

잠결에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꼬대하는 딸을 토닥거렸다.

“엄마, 물이 계속 밀려와.”

왜 자꾸 물 타령이지? 방콕에서 수영을 많이 그런가, 비가 와서 그런가, 물이 나오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엄마, 엄마, 물이 찰랑찰랑 거려.”


물? 혹시 이거 물? 아차 싶었다. 웰컴 드링크를 마시게 하는 게 아닌데. 딸이 오줌을 쌌다고 생각해 벌떡 일어났다. 이불을 걷고 보니 발밑에 물이 한가득이었다. 물병이라도 쏟은 줄 알았다. 아니다. 기차 벽에 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기차에 비가 새는 것이다. 비 새는 기차라니! 기가 막히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승무원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모르겠고, 다들 자고 있어서 소란을 피울 수가 없어서 침대 끝에 앉아 물을 피하면서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침대 기차의 재미는 자다가 깨어보면 다른 시공간에 이동해있는 것이지만, 그런 서프라이즈는 없었다. 대신 기차에서 어둠에 잠겨 있는 숲의 윤곽을 따라가고, 여명이 밝아오면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창밖 세상을 구경하면서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과 기대에서 어긋나는 일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침대 기차의 꿀잠은 없었지만 열대우림을 달리는 기분, 자다가 물이 잠기는 느낌, 비가 새는 기차는 오래도록 잊을  없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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