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를 생명보다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면 스스로의 생명을 초개처럼 던진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겪게 될 고통은 크게 고려사항이 안 되는 듯하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평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그 가치에 반하는 행동의 결과로 겪게 되는 자기 부정과 사회적인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존재의 근거가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살아남아 겪게 될 고통을 회피하는 일이다. 잠깐의 고통은 그래서 남은 삶보다 달콤하게(?) 여겨진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면 문제는 많이 달라진다. 인간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로되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종교적 관점에서는 정말로 큰 일이다. 종교적 관점을 떠나서도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고도 한다. 이 땅에 허락된 삶의 시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질문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곧 잘 죽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명예를 지키는 일도 잘 살아갈 때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영욕의 삶이라고 한다. 살다 보면 영광스러운 날도 있고 욕된 날도 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남들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삶을 살아갔다고 하더라도 부끄럼이 없을 수 없건만 부끄럼 때문에 세상을 등지는 일은 안타까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잔치에만 참여하고 뒤치다꺼리는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의 소산이다.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참회하고 돌이키고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다. 상대방에게 용서해 줄 기회마저 빼앗는 일이다.
또 다른 죽음을 놓고 말들이 많다. 구국의 영웅이라며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 독립군을 토벌하던 전력이 문제다. 그는 이런 과거 행적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없이 천수를 누렸고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발간한 어떤 책에는 자산의 과거의 행적에 대해 민중들의 평안한 삶을 위해 테러리스트를 처단한 일이라고 썼다고도 한다.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식민지 청년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라고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은 일정 부분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변론한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는 합리화다. 스스로를 합리화한 사람은 거리낄 것이 없이 오래살고 자기 합리화를 못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2천억대 빌딩을 남기고 간 사람과 집 한 채 없이 빚만 남기고 간 사람의 대비되는 죽음이다. 두 죽음 모두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일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경 속의 인물 다윗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을 만큼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칭송된다. 그런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내몰아 전사하게 만든다. 이런 죄를 꾸짖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에 다윗은 곧바로 회개한다. 다읫의 위대한 점이다. 온전한 회개에는 용서가 따른다. 용서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들에게 요구되는 일이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적발된 여인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하셨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하시면서 여인을 보내셨다. 부끄러움도 죄도 용서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돌을 든 사람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