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리생각 Aug 25. 2020

나태함에 대하여

우리의 뇌는 복잡한 사고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다니엘 캐너먼은 그의 역작 "Fast Thinking, Slow Thinking"(한글판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사람들의 사고체계는 크게 "Fast Thinking (직관적 사고)"와 "Slow Thinking(분석적 사고)"로 나뉘어 있고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 우선적으로 “Fast Thinking”에 기대어 직관적으로 얻게 되는 생각에 의존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직관적인 사고란 예술이든 과학이든  어느 분야에 있어 돌파구를 찾아내는 “창조적 직관(Creative Intuition)”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어 익숙해진 사고방법을 말한다.  화가 잔뜩 나 있는 사람의 얼굴 표정만 봐도 그가 어떤 상태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것 같이 복잡한 두뇌활동 없이 곧바로 답을 내는 사고 활동을 말한다. 이에 비해 에너지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분석적 사고의 영역은 직관적 사고로써는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비로소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 실제로는 분석적 사고를 동원해서 답을 찾아가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도 직관적 사고를 통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럴싸한 답을 정답이라고 간주해버리고는 더 생각하기를 그만둔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각과 판단의 수많은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인간의 나태함은 생각의 나태함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동물"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생각 없이 부지런한 사람도 있다.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고 그 부지런함이 루틴이 되어 버리지만 생각에는 별다른 발전이 없다. 개미처럼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한낱 개미와 같은 일생으로 끝나버린다. 묘지석에는 "일생을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다가 여기 잠들다"라고 적어 넣을 만하다. 생각의 나태함이 낳는 치명적인 결과다. 생각은 보고 듣는 데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보는 듣는 것은 적극적인 활동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示而不見),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된다(聽而不聞).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는 것에서 우리의 생각은 길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의 결들이 하나 둘 쌓여가면서 안목이 생겨난다. 그렇다고 어떤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고 해서 모두가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들수록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기에 연륜이 높다고 해서 젊은이보다 더 나은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안목도 없이 참견하니 '꼰대'가 된다. 생각은 숙성되지 않은 채 나이만 들어 자신의 지엽적인 경험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2,500년 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지금에 봐도 새롭다. 죽을 때까지 생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던 자들의 생각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여서 소크라테스가 다시 등장한다고 해도 고발장을 남발할 것 같다. 시민단체라는 간판을 달고 고발장만 남발하는 집단들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생각 없는 행동주의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지혜를 찾아보기 어렵고 지혜자는 고전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과학기술문명은 2,500년 동안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이룩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발전한 게 없다. 오히려 문명의 발전이 사고의 나태함을 도와주고 있고 분주한 삶은 생각 없는 부지런함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고대의 노예제 사회에 있어서나 중세의 봉건사회, 근대의 산업사회에 있어서 나태함은 죄악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나태함은 행동의 게으름이다. 게으른 종은 용서받지 못한다. 부지런함이 미덕이고 일찍 일어나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되었다. 종의 미덕은 행동의 부지런함이고 생각까지 부지런하면 문제였다. 생각하는 일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앉아서 생각만 하고 실천이 없는 게으름도 있겠지만, 생각이 깨어있으면 행동으로 발현된다. 생각은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고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다를 때는 사실은 그 사람의 생각과 말이 다른 것이겠다.  


초격차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더 이상 행동의 부지런함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생각이 부지런하고 민첩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앞으로의 변화의 방향을 생각하면서 미리미리 대비하여야만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어 이제는 행동의 부지런함보다는 생각의 민첩함이 요구된다. 움직이는 것보다 변화의 방향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해진 까닭이고, 조급했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러나 '생각'하기보다는 '검색'하기에만 바쁜 것이 현실이다. 인터넷 세상은 정보의 바다라고 하지만 '검색'으로 생각을 대신할 수 없다. 검색한 정보들을 짜깁기하는 스킬은 보고서 작성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생각을 고양시킬 수는 없다. 생각은 되새김질이 필요한 일이고 속도전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크린 타임을 줄이고 스토밍 타임을 늘려야 되는 일이다. Slow Thinking이 일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는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다. 산책을 하다가 생각을 얻기도 하고 목욕을 하다가 창조적 직관이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박함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