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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Mar 10. 2022

영국인이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방법


술 마시기와 정원 가꾸기 외에 영국인들이 진심인 분야가 또 있었으니 바로 창문 꾸미기다. 14세기부터 종을 만드는 주종소와 실크 방직 산업이 번창했던 우리 마을엔 지금까지도 전기차보다는 마차가 어울릴 법한 집들이 많이 남아있다. 도대체 저런 곳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설레게 만드는 집들은 정원이며 현관문, 창가 장식까지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다. 역사가 깃든 집에 사는 이에게 마땅히 따르는 의무라 생각해서 집 앞 꾸미기에 누구보다 열심 인지도 모를 일이다.



평소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자태에 감탄하며 지나던 이 집 창가에서 재미난 스토리텔링을 발견한 건 핼러윈 무렵이었다. 안 그래도 창가에 이쑤시개로 만든 집 모형을 전시해놓았을 때부터 예사로운 집은 아니다 했다. 그러다 한 땀 한 땀 헝겊을 꿰매 만든 쥐 인형들에게 화장솜이며 두루마리 휴지, 마트표 초콜릿 등으로 핼러윈을 익살스럽게 승화한 작품들을 보니 발걸음을 멈추고 키득거릴 수밖에.



크리스마스 때는 또 어떤가? 영국인들은 1년 내내 선탠 휴가와 더불어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린다던데 아니나 다를까, 창문틀 사이로 집주인의 고퀄 잉여력이 폭발했다. 빨간 산타복을 입고 자전거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배달하는 산타쥐부터, 온 식구가 명절 내내 먹어도 냉동실행이 분명한 통통한 칠면조 식탁을 구현한 디테일까지! 봐도 봐도 감탄만 나온다.


영국에는 성탄절 만찬을 먹으며 온 가족이 크리스마스 크래커(Christmas cracker)라는 폭죽을 함께 터뜨리는 풍습이 있다. 길쭉한 알사탕 껍질같이 생긴 크리스마스 크래커를 양팔을 교차해 옆사람과 한쪽씩 힘껏 잡아당기면 펑~ 소리가 나면서 선물이 쏟아진다. 사실 선물이라 하기엔 민망한 예쁜 쓰레기와 아재 개그나 난센스 퀴즈가 뒤섞인 쪽지, 그리고 얇은 습자지로 만든 왕관이 내용물의 전부다. 성탄쥐들이 쓰고 있는 왕관이 바로 크리스마스 크래커용 선물이라 창가 풍경을 통해 영국 최대 명절의 정수를 맛본 셈. 과연 우리 동네 최고 스토리텔러다운 깜찍한 크리스마스 전시회다.



어제는 길을 걷다가 멈칫했다. 늘 장난기 가득한 헝겊쥐들의 손에 파랑과 노랑의 보색 대비가 선명한 우크라이나 국기가 들려있기 때문이었다. 연일 전쟁 피난민들의 소식을 접하며 쓰라린 마음이었기에 평온을 상징하는 파랑과 기쁨을 나타내는 노랑을 품은 우크라이나 국기의 모순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


오늘만큼은 창가를 통해 기발한 상상력이나 해학을 뽐내는 게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고 멀리서나마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집주인. 사상이나 이념, 국적과 종교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마음만은 하나임을 헝겊쥐들의 속삭임으로 들려주고 있었다.


<꼴랴다(Kolyada)>라는 작품을 통해 색색의 씨줄과 날줄로 풍성하게 짜인 우크라이나의 크리스마스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작가 페이스북)


우크라이나의 태피스트리 작가 올가 삘유히나(Olha Pilyuhina)의 작품 꼴랴다(Kolyada)는 영국 헝겊쥐들이 사랑하는 크리스마스를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떻게 즐기는지 보여준다. 꼴랴다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러시아, 벨라루스 등에서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찬미하는 슬라브족의 크리스마스 축제이다. 혹독한 겨울 동안 동지(冬至) 무렵의 태양을 찬양하는 지역 축제에 기독교의 크리스마스 풍습이 결합되면서 지금의 꼴랴다로 거듭났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젊은 남녀가 찬송가를 부르며 마을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풍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녀가 촘촘하게 엮어낸 태피스트리 작품은 다른 듯 그만큼 닮기도 것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니냐고 귀띔하는 듯하다.


꼬불꼬불 제각각의 색실들이 찬찬히 엮여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태피스트리의 미학(사진 출처: 작가 페이스북)


어제 평소 좋아하는 러시아 유튜버의 계정에 현 상황에 부끄러움을 느껴 잠시 떠나 있겠다는 포스팅이 올라와 있었다. 그동안 러시아인이라는 국적보다는 슬라브족이라는 민족성에 자부심을 느끼며 할머니의 만두 레시피나 슬라브계 고양이 동무에 대한 포스팅으로 본인의 뿌리를 알리는 유쾌한 영상을 올리던 그였다. 나라는 달라도 같은 문화를 나눈 민족끼리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에 참담한 그의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착잡하게 전해졌다.


13개의 슬라브족 국가들이 서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하나의 꽃무늬를 만들어내듯, 각자의 국적과 민족성을 살리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연결된다면 마법의 양탄자 같은 광대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다는 작품의 위로. 그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전언이었다.


<자유(Freedom)>라는 작품 앞에선 작가에게서 평화로운 날들의 우크라이나 풍경이 그려진다(사진 출처: Timaxart)

        

구름 위를 유영하듯 너른 들판 위를 신나게 달리는 말 한 마리. 자유라는 작품명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내음이 모니터 너머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우리가 오늘 아픈 가슴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건 그들의 전쟁이 아닌 우리 모두의 전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터로 향하는 아버지가 어린 딸을 부둥켜 앉고 하염없이 우는 모습에서 함께 눈물짓는 건 우리가 결국은 하나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은 아닐까. 자그마한 종이 국기 하나가 내게도 존재하는 그 마음을 깊숙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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