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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Aug 09. 2020

오늘을 낚는 삶

 나중이란 영영 없을 수도 있으니까


얼마 전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오롯이 두 발로 걸어서 횡단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여행기 <나는 걷는다>를 읽다 훅 들끓어 오르는 격한 흥분을 느꼈다. 책과 자연 모두를 뭉근하게 짝사랑하는 나에게 찰떡같은 직업인 삼림 관리인의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한여름에는 숲과 계곡을 누비며 나무향 가득한 깊은 산속에서 일하고, 소복이 눈 쌓이는 겨울이면 좋아하는 책들을 실컷 쌓아놓고 귤 까먹으며 읽는 삶이라니. 은퇴해서나 누릴 법한 꿈결 같은 일상을 심지어 소정의 급료를 받으며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곧장 휴대폰을 들어 폭풍 검색에 돌입했다. 산림청 웹사이트에 들어가니 마침 숲생태관리인을 모집 중이었다. 숲해설가나 산림치유지도사와는 달리 별다른 자격증이 없어도 지원할 수 있는 직책이었다. 마감 사흘을 앞두고 필요한 서류들을 부랴부랴 준비해서 익일 특급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마감 다음날, 출근 가능 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고는 거실이 들썩들썩하게 돌고래 비명을 질렀다!


내가 숲에 대해 뭘 안다고....

어차피 뽑히지도 않을 텐데 괜한 헛수고 아닐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또 어쩌지...


삶이 은근슬쩍 흩뿌려준 기회에 도전해보지 않고 요모조모 따져보다 흘려버렸더라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손톱 아래 말랑살까지 짜릿한 성취감이었다.






삶은 굽이굽이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가 수많은 책을 읽고,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 것도 결국 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제대로 된 나만의 길을 향하려는 동기가 크지 않을까?


되도록 효용성 높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겠지만, 안정만을 추구하다 보면 도전을 피하는 향도 굳어지게 마련이다. 현상 유지만을 하는 삶이란 흰쌀밥만으로 이뤄진 밥상 같은 것. 물론 그 정도면 족할 수도 있는, 꼬숩고 따끈한 찰진 밥 한 공기. 하지만 난 기왕 놓는 밥상, 매콤한 두부 두루치기도 올리고, 속이 확 풀어지게 시원한 연포탕도 끓여놓고, 주말이면 별식으로 총천연색 색감이 폭발하는 멕시칸 타코도 고루 차려 맛보고 싶다.  


돌이켜보면 소박한 성취로 이루어진 삶일지라도 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모험을 겁내지 않고 일단 행동에 옮겼다는 데 있다. 아니, 사실 많이 두렵고 확신도 안 서지만 두 눈 질끈 감고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풍덩 뛰어든 그 소심한 용기에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싶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경험이 켜켜이 쌓여 삶의 맷집이 조금은 단단해진 내가 있게 되었으니까.


새로운 시도를 꺼려하지 않은 덕분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늘 궁금하기만 했던 타인의 삶 푸짐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공연장 백스테이지의 벌집 쑤신듯한 긴박감도 속속들이 겪었고, 그 옛날 애국가 화면에서만 보던 반도체 공장을 새하얀 방진복을 입고 마음껏 드나들어 보기도 했으며, 가죽 공장의 비릿한 탄내를 들이키며 후각이 줄 수 있는 압도적인 충격 또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한 번뿐인 삶이지만 겹겹이 중첩된 인생을 한꺼번에 살아내는 듯한 깊은 충족감을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축복처럼 맛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처럼 나도 언젠가는 숲 속의 전원주택에 살며 꼬마 텃밭을 가꾸고 꽃도 예쁘게 심어보고픈 열망을 오랫동안 간직해왔다. 그러다 삼 년 전 아직 매서운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월, 남편과 함께 서울 근교 이곳저곳으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모아놓은 돈도 없었고, 확실한 귀촌 계획도 없었지만 그냥 구경이나 한 번 해볼까 하고 가볍게 시작한 나들이. 그 미약한 시작의 끝에 결국 그 해 5월 덜컥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3개월 동안 100여 채의 집들을 둘러보며 꿈을 꿈으로만 묻어두기에는 가슴이 너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급작스러운 결정이었기에 그만큼 고생도 시원하게 했다. 잔금을 치러야 할 시기가 다 되어가도 서울의 거처가 팔리지 않아 직접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 인근 부동산 30여 군데를 돌아다니며 간절히 부탁을 해야 했고, 인테리어 수리를 할 만한 여유자금이 없어서 직접 자재를 구입하고 스스로의 노동력으로 공사를 진행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푹푹 찌는 한여름, 냉장고도 없이 아이스박스에 기본 먹거리만 쟁여놓고 새벽부터 쉬지 않고 일하다 밤늦게 캠핑용 침낭 안에서 잠을 청할 때면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지 싶어 후회한 밤도 많았다.


하지만 은퇴하고 기반이 다 갖춰지면 전원주택으로 이사 가겠다는 막연한 희망만을 간직했더라면 지난 3년 간 새소리를 들으며 맞이해 온 숲 속의 아침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완벽한 미래만을 꿈꾸지 않고, 조금 허술해도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소박한 충족감에 집중한 덕분에 누리게 된 오늘의 일상이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다.


매 순간 행동하는 삶 속으로 뛰어든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내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신비를 온전히 빨아들이며 살아가고프다. 책을 가까이하고 배움에 늘 목마를 지라도 배움의 끝은 결국 생각을 행동으로 실현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싶지는 않다. 설익은 판단으로 때로는 실수를 할지라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접어든 싱싱한 날것의 세상에서 힘차게 펄떡이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나를 진정 나답게 하는 것은 책 속에서 엿본 그 누구의 완벽한 간접 경험도 아닌 오직 내 결대로 살아낸 나만의 일상이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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