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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May 03. 2019

대학 시절의 꿈에 덜컥 도전해봤다


모든 것은 한 번의 카톡에서 시작되었다. "딱 맞는 기회예요!" 동호인 모임에서 만난 신비한 그녀. 문득 생각났다며 보내준 샹그릴라의 바람결 영상으로 지친 하루를 말갛게 씻어주던 존재였다. 취향도 가치관도 닮은 구석이 많아 자주 만나진 못해도 마음 한구석을 뜨끈히 차지한 그녀. 그런 이의 귀띔이었기에 궁금함이 증폭됐다. 해외 애플리케이션의 한국어 내레이터를 뽑는 구인광고였다. 일명 앱 읽어주는 여자.




대학 생활의 지분 중 팔 할을 차지한 건 여행 그리고 연극반 활동이었다. 공강 때면 과방보다 연극반 동아리실 붙박이로 살던 시절. 강당에서의 연기 동선 연습, 잔디밭을 울리던 복식호흡 연습(과 술술 이어진 술자리), 빈 강의실을 전전하며 이어가던 대본 리딩 연습까지. 전공 불문하고 뭉친 동아리원들은 역시나 졸업 후에도 공연계 이곳저곳에서 푸릇했던 시절의 삶을 이어나갔다. 배우, 연출자, 성우 혹은 나처럼 공연기획자로.


음향으로 연극반에 입성한 내가 돌연 배우로 전향한 계기는 빼어난 연기력이 아닌 쩌렁쩌렁한 발성에 있었다. 체구에 비해 어쩐지 압도적으로 성량이 풍부했던 나. 고구려 기마민족의 후예였던가 싶게 대강당을 울리던 박력 있는 샤우팅이었다. 그 덕에 환자 2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여주인공까지 꿰찼다. 때마침 방송국 성우로 합격한 선배를 보며 자연스레 성우의 길로도 눈길이 쏠렸다. 그러다 우연히 맡은 한 탭댄싱팀의 내한공연 업무. 한 번 내디딘 발걸음은 나를 더욱 깊숙이 공연 기획자의 길로 이끌었다. 잠시 설렜던 성우의 꿈은 어느새 스르르. 그리고 이 나이에 이르렀다. 이제는 공연계와 한참 멀어진 영역에 서서.



앱녀용 지원서를 신나게 작성하고 있자니 거침없던 그 시절의 패기가 되살아났다. 모처럼 파닥파닥, 살아 숨 쉬는 싱싱한 느낌. 짜릿했다. 사그라들었던 불을 다시 지피니 세상의 온갖 기회로 눈이 돌아갔다. 그러다 발견. 김영하 단편선 오디오북 공모전이었다. 내친김에 '앱 읽어주는 여자'에서 '책 읽어주는 여자'까지 두루 섭렵하고파 졌다. 곧바로 녹음기 앱을 다운로드하고, 낭독 글감 링크를 눌렀다. 그리곤 깨달았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정말이지 하나도 없구나. 이따금 <생활의 달인>을 보며 느끼던 바로 그 깊숙한 깨달음이었다. 강약을 조절해가며 또박또박 활자를 읽어나가는 행위의 어려움. 2분 3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참아냈던 침 넘김은 또 어떻고.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녹음 하나를 마치곤 바로 생수병을 통째로 비워냈다. 그리곤 하루 종일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그나마 마음에 든 녹음 파일 2개를 간신히 보내고 나니 휴우-하고 오장육부가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이 났다. 아직 성과를 내기엔 이른 도전. 하지만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나에게 방울방울 생각거리를 던져준 계기였다. 안정감에 젖어 어느새 잊고 지냈던 도전의 강렬한 쾌감. 묵혀뒀던 다른 꿈들도 새롭게 도전해보고픈 욕구가 생겼다. 어릴 때 난 이런 걸 좋아했었지, 하며 곱씹기 시작한 옛 기억들. 때 아닌 추억 소환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오늘처럼 노력이란 걸 기울여보고 싶어 졌다. 커리어를 통째로 바꾸겠다는 거창함일랑 내려놓은 채. 우선 즐거운 도전이 되도록. 경험치 +1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팔딱거리는 생동감을 맛보도록. 그러다 운 좋게 새로운 길이 열리면 신나게 달려가 보도록.




드라이 맡길 옷 뒤지다 발견한 쌈짓돈 같은 경험이었다. 먼 훗날 올지 안 올지도 모를 현실감 없는 거대 행복은 내 취향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매일 조금이라도 누리는 기쁨이 내겐 진짜다. 경력에서 좀 돌아가고, 돈벌이가 덜 돼도 감수하고픈 희열. 그 어떤 부자보다도 경험 부자로 살아가고픈 나에게 삶이 툭 찔러준 쌈짓돈을 발견한 전율이었다. 김나영 시인의 글을 읽어 내려가며 오늘만큼은 꿈이 습관을 앞지르도록 즐거이 힘쓰겠노라, 되뇌어본다.

                                                                                                                                                                                               

                                               

습관이 꿈을 앞지른다

김나영         


내 꿈의 품사는 동사(動詞)
꿈이 비포장도로를 걷는다.
오늘에 살면서 늘 오늘에서 도망치려하는 습성을 지닌다.
젖은 외투 같은 외로움을 입고 가는 길에
옹기종기 이름 모를 들꽃이 제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
해는 저물고 있는데 축축한 내 꿈의 안식처는 어디 있는가.
다가설 때마다 장난처럼 꼬리를 감추는
꿈의 길목에
설정된 배경처럼
안개는 저 멀리서 스멀거리고
내 종아리는 제자리걸음으로 튼튼해졌지.
안개 속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도박 같은 것.
돌부리에 채어 발목이 부어 오른다.
돌부리보다 뾰족하게 자란 습관이 고개를 쳐든다.                                                             





<대표 사진 출처: tibetkailashtre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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