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가을 성애자인 나. 올해만큼은 어쩐지 봄바람에 살랑살랑 실려 산으로 들로 나다니고 있다. 콧바람 잔뜩 든 채 룰루 룰루. 운전하면서도 연신 흥얼흥얼. 라디오 볼륨은 이미 최대치. 한껏 내린 창문 사이로 실려오는 포근한 봄바람에 사르르 녹아내린다. 직선거리를 두고 둘러둘러 벚꽃길로 귀가하는 내 모습이 오매, 낯선 것. 윤대녕의 단편 소설을 읽다 문득 시선이 멈춘 문구처럼 우리 나이엔 정말이지 봄을 조심해야 하나보다. 들썩들썩한 이 기분 그대로라면 터키 카파도키아의 열기구처럼 두둥실 두둥실 바람에 실려 정처 없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
여름이 가을로 익어가는 은근함과는 달리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는 적나라하다. 팝콘 튀기듯 팡팡 만발하는 꽃잎들을 보면 차디찬 동토였던 지난겨울이 무색할 지경. 극적인 변화라 나무늘보 같은 나에겐 어질어질하다. 조증에 가까울 정도로 붕 떠다니는 요즈음의 나. 겨우내 인색했던 일조량이 풍부해지면서 체온이 오르고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세로토닌이 증가한 덕분이라던데. 어째 올봄에만 유난한 걸까? 딱딱하게 굳었던 겨울 땅에서 슬그머니 돋아난 새순을 보니 절로 마음이 들뜬다. 나 또한 경직된 일상의 틈새에서 뭐든 새롭게 싹 틔울 수 있으리라는 명랑한 희망.
의외로 봄만 되면 우울감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다. 흔히 '봄 탄다'라고 하면 크게 두 부류. 나처럼 조증에 가깝게 마음이 살랑살랑 이는 자가 있는 반면, 무기력증을 동반한 계절성 우울증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다. 몸은 노곤 노곤하다 못해 천근만근. 헛헛한 마음 한편엔 허무함이 안개비처럼 젖어드는 기분.
화사하다 못해 위화감마저 드는 찬란한 꽃무리. 봄은 저토록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동안 난 과연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눈부셔질수록 지금의 내 모습이 한층 텁텁하고 초라해지는 기분. 많은 이들이 SNS 속 그늘 없이 뽀얗게 보정된 세상에서 박탈감을 느끼듯, 절정에 이른 봄꽃 잔치 한가운데서 나만 동떨어진 듯한 소외감을 맛본다고들 한다.
꽃들이 퐁퐁 피어오르는 초봄보다 꽃잎이 하나둘 지기 시작하는 늦봄을 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 낙엽을 보며 스산해하듯,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허무감이 스며들기 때문. 발리의 해변에서 서서히 저물어가던 호박색 석양을 보며 쓸쓸해하던 배우 윤여정의 모습도 겹쳐진다. 한때 더할 나위 없이 찬란했으나 세월에 그만 속절없이 사그라든 아름다운 존재들. 그들을 보면 울컥하고 서릿한 슬픔이 잦아든다.
올해만큼은 봄날의 우울감이 스며들지 않았다. 왜일까.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겨우내 봄 준비를 단다이 한 덕분인 듯싶다. 작년 12월, 일 년을 마무리하면서 올해는 소소하지만 꾸준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한 해로 삼기로 했다. 큰 성과, 벅찬 행복이 아닐지라도 자그마한 일상의 뿌듯함이 이어지는 나날들을 만들어가기로. 그동안 세웠으되 지키지 못한 신년 계획들을 모아 재활용하기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서툴지만 흥겨운 우쿨렐레 연주가 일상이 되는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을 5분 명상으로 맞이하고 신선한 원재료를 도시락으로 준비하는 습관. 흘러가는 세월에 끌려가는 내가 아니라 스스로 일상을 주도하는 위치로 변해보니 시간의 흐름이 달리 다가왔다. 세월의 힘에 윤기를 잃어가는 얼굴빛은 여전히 서글프지만 희망이란 게 살포시 생겨났다. 최소한 변해가는 계절의 끝에서 조금은 더 나아져있을 나 자신이 기대되는 마음. 우선 이것으로 족하지 싶다.
조팝나무가 피어낸 자그맣고 하얀 꽃무리처럼 잔잔하게 마음을 밝히는 봄. 그런 봄이었음 한다. 벚꽃축제 뒤 길바닥에 짓이겨진 분홍 꽃잎들을 보며 처참했던 마음일랑 느낄 새 없이. 알싸한 풀내음 맡으며 초여름으로 은은하게 넘어가고 싶다. 내년 봄도 허무함이 아닌 달뜬 설렘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올 한 해 사뿐사뿐 꽃길 열어갈 수 있기를. 알토란 같은 하루의 연속이기를. 주문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