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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Apr 11. 2019

전학생의 생존법

프로전학러의 무대공포증


전학에 관해선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나. 초등학교 6년 동안 3개국 5개 학교를 전전했으니 전학 생존자라 할 수도 있다. 마음에 굳은살이 배기기 전, 전학생이 되는 경험은 잔인하다. 발가벗겨진 채 뜨거운 조명이 내리쬐는 단상 앞에 끌려온 기분. 짝꿍의 사라진 지우개가 하필 내 자리에서 나와 억울하게 비난받는 듯한 공포가 엄습한다. 조잘조잘 잘도 떠드는 명랑 발랄한 어린이였지만 이 심판의 순간이 늘 두렵기만 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강제적인 통과 의례라 더욱 그랬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반면 직설적이다. 필터라는 게 없다. 사회적 예의라는 것이 제대로 발달하기 전. 솔직함과 무례함이 구분이 안 가는 시기라 그런지도 모른다. 나의 호기심이 너의 상처보다 앞서는 나이. 전학생에 대한 궁금함과 함께 '어디 얼마나 잘 버티나 두고 보자'하는 묘한 텃세가 공존한다. 새 학교로 전학 가는 전날이면 밤새 뒤척이던 잠자리의 몽롱함이 새삼스럽다.


사진: unitedwaygcr.org


전학생의 생존법도 문화와 연령에 따라 차이가 존재한다. 나의 첫 학교는 미국 시카고. 가뜩이나 미국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았던 나. 부모님께서 유치원비를 아끼려 5살에 초등학교 입학을 시켰던 터라 유난히 도드라졌다. 반 아이들을 1열로 쭉 세우면 혼자 땅으로 쑥 꺼진 꼬꼬마. 하지만 온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이답게 거침이 없었다. 영어를 몰라 주눅 든 것이 아니라 한국말을 못 하는 아이들을 되려 답답해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저 않고 손 번쩍 들어 물어봤다. 부끄러움이란 게 없었다. 친구가 생기길 기다린 게 아니라 알아서 부대끼며 어울렸다. 돌이켜보니 이 나이대에만 나올 수 있는 당찬 모습. 급기야 친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나의 근자감은 반 친구들에겐 어느새 당당함으로 받아들여졌다. 겸손함보단 자신감을 앞세우는 미국 문화의 덕을 본지도 모르겠다. 인종차별이라는 개념도 전학생이라 따돌림받는 느낌도 없었던 내 전학 인생의 황금기였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초등학교 2학년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무기인 우리 정서상 동급생보다 2년이나 어리다는 것은 치명적이었기에. 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외국에서 온 아이들이 드문 시기라 교실 창 밖에서 기웃기웃 구경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부산 해변을 산책하는 알파카가 된 기분. 당시 외국에서 온 아이가 옆반에 딱 한 명 더 있었다. 독일에서 온 그 친구는 아이들의 동경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다. 신기함에 자꾸 독일 이야기를 물어보면서도 막상 그 친구가 독일 에피소드를 풀어놓으면 잘난 척한다고 험담하기 일수. 종잡을 수가 없는 아이들의 반응에 난 되도록 입을 닫고 지내리라 다짐했다. 어린 나이에도 생존 본능이란 기막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우리네 속담을 몸소 체득한 나. 들볶이지 않고 마음 편히 지내려면 쥐 죽은 듯이 지내야 한다는 현실 삶의 지혜도.


전학생의 일과는 본인 마음대로 꾸려지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쉬는 시간에 옆반 아이들까지 찾아와서 영어로 아무 말이나 한마디 해보라고 찔러본다. 경복궁에 사생대회라도 가는 날이면 초긴장. 지나가는 외국인만 보면 다짜고짜 내 등을 떠밀고 영어로 대화를 시켜본다. 한두 번도 아니고 점점 지쳐갔다. 영어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게 아니었다. 동급생들에게 난 신상 장난감이었다. 벌써 작년 생일 선물 취급받는 독일 친구는 이미 아이들의 관심 밖. 앞에선 환호하고 뒤로는 험담을 이어가는 혼란의 날들에서 벗어난 그 친구는 외롭지만 편안해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비싸게 군다고 비난받고, 시키는 대로 하면 잘난 척한다고 욕먹는 구도. 마음이 어지럽던 시절이었다. 누구 한 명만 더 전학 와라. 간절한 기도는 통했고 말레이시아에서 뉴페이스가 왔다. 드디어 내게도 짧은 평화가 깃들었다.


전학을 두 번 더하고 6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묵직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난 더 이상 모두의 심판을 받는 전학생이 아니었다. 굴러온 돌이 아닌 이미 박힌 돌로 굳건히 내 자리를 잡았다. 방과 후 우르르 몰려다니며 떡볶이를 사 먹는 단짝 친구들도 생겼다. 원치 않는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면서 불편해하던 시절의 기억은 서서히 바래갔다. 7명의 소우주 속에 편안히 스며든 내 존재가 편안했다. 내일이 되어 학교로 향하는 것이 처음으로 설레던 시절이었다.


사진: parents.com


때문에 6학년 2학기가 되어 갑자기 프랑스로 간다는 건 내 소우주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벌써 5번째 전학. 5번째 공포. 프랑스는 5학년까지가 초등학교 과정이다. 뜬금없이 중학생이 된다니 더욱 떨렸다. 갑자기 어른이 되어야 할 듯한 부담감. 내가 전학 간 중학교는 파리 인근이라 그런지 외국인반이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대부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국가 출신 아이들. 학교엔 베트남이나 라오스 보트피플 출신의 동양 아이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다. 이들은 이민 2세라 얼굴만 동양인이고 마인드는 뼛속까지 프랑스인인 아이들이었다. 프랑스 아이들이 '바나나'라 인종차별 가득한 별칭으로 부르던. 프랑스 아이들하고도 외국인반 아이들하고도 섞이지 못하던 부유하는 영혼들.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 펜스 근처에서 이어폰 꼽고 땅만 쳐다보던 그 아이들의 공허한 눈빛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난 외국인반에서는 프랑스어 수업을, 수학이며 세계사 같은 과목은 프랑스 아이들과 수업을 들었다. 프랑스 아이들에게 난 좀 이상한 카테고리의 아이였다. 처음 듣는 한국말에 영어도 구사하니 혼란스러워하던 그들. 한 번은 수학 시간에 원주율을 구하는 문제가 나왔다. 한국에서 배운 대로 3.14159265358979... 을 외워서 썼더니 선생님이 내가 커닝한 줄 알고 교무실로 데리고 가셨다. 계산기 없이 즉석에서 다시 원주율을 적어내려가니 그제야 놀라워하며 사과를 하셨다. 이 일화가 퍼져 난 졸지에 한국에서 온 수학 천재로 불리게 되었다. 수학 강국이자 암기 왕국인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이 나를 인종차별의 입구에서 구원했던 고마운 날. 프랑스 학교도 미국에서처럼 자신감 넘치는 자가 살아남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을 가는 게 아니라 무시를 당했다. 세계사 시간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쬐깐한 나라라며 얕보던 여자애에게 내가 알던 모든 전래 동화와 올림픽과 호돌이까지 동원하며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그려나갔다. 아이들은 내 열변의 내용보다 침 튀기는 열정을 인정했다. 이곳에서도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자가 존중받았다. 깡다구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아이 잘난 척한다고 배척당하기보단 자기 색깔이 분명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말 그대로 리스펙트.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 나만의 브랜드가 생기는 것이다.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한국의 중학교로. 자만심이 아닌 자존감이 '건강한 자신감'으로 표출되는 문화.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번에는 눈치 좀 덜 보고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어떻게 해도 결국엔 호불호가 갈린다. 누구에게나 100% 사랑받는 사람은 없다. 풍파를 피해 조용히 있으면 차갑고 거만한 아이, 하고픈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잘난 척하는 아이로 낙인찍힌다. 그럴 바에야 가장 나다운 나로 사는 게 최소한 마음 편하지 않을까?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우리 반에는 나보다 한 학기 전에 전학 온 아이가 한 명 있었다. 뽀얀 피부에 똑단발, 호리호리 길쭉한 체구의 그녀는 첫인상처럼 버들잎같이 여리고 조용한 아이였다. 속 깊은 내향인이었던 그녀에게 전학생의 굴레는 버거운 듯했다. 혹은 귀찮았는지도. 점심시간도 귀갓길도 그녀는 늘 혼자였다. 하지만 외롭기보단 어쩐지 고고한 모습. 반 아이들 사이에서 어느새 '원래 그런 아이'로 받아들여졌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선택한 우아한 고독이었다. 이 나이쯤 되어 생각해보니 그녀는 내면이 참 굳건한 사람이었다. 유리 멘탈이라면 그렇게 흔들림없이 고독을 이어갈 순 없지. 혼자서도 잘 놀지만 늘 혼자인 것은 좀 심심했던 난 서서히 옆 짝꿍, 앞 짝꿍들과 친해져 갔다. 처음에 프랑스에서 온 애라고 나를 고깝게 보던 한 아이는 지금까지도 속내를 털어놓는 평생 친구로 남았다. 우리가 친구가 된 지 한참 후에서야 한때 나를 미워했노라고 털어놓았을 때 내심 놀랐다. 나를 싫어하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를 대하던 내 태도는 한결같았는데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바꾼 걸까? 억지로 계획하지 않 부분에서 변화가 찾아왔기에 모든 걸 신에게 맡긴 듯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나 자신으로 행동할 때 시간은 결국 내 곁에 내 사람을 남긴다.


사진: thestar.com


어릴  나를 지배하던 전학생의 트라우마는 때때로 무대공포증이란 이름으로 나를 엄습한다. 또다시 발가벗긴 채 따가운 조명 아래서 비난받는 모습. 그런 공포감이 나를 휘감을 때면 나에겐 두 가지 처방이 있다.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연극 무대라고 생각하는 것. 혹여 비난받는 것도 나 자신이 아닌 내가 맡은 극 중 역할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대학 때 연극반 활동을 했던 난 음향에서 시작해서 환자 1, 2 역할을 거치며 어느새 주연 배우까지 맡았다. 이때까지도 어릴 적 무대공포증이 남아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조별 과제 발표 때보다 연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편이 덜 떨렸다. 다른 이로 빙의했다는 마음가짐이 내게 쏟아질지 모를 비판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준 것. 또 한 가지 즉효약. 발가벗겨진 건 내가 아니라 청중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침에 화장실에서 바지 내리고 얼굴에 실핏줄 돋을 만큼 힘주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공포가 금세 실소로 변한다. 고상한 이미지는 아니지만 효과만큼은 끝내준다.


프로전학러 시절은 마음이 고단했다. 단상에 섰던 그 모든 찰나.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래도 그 지긋지긋한 기억이 지금의 멘로 굳혀졌다. 강하진 않아도 질기디 질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가도 물벼락 한 방에 금세 굳어지는 그런. 지금도 어딘가에서 잠 못 이룰 내일의 전학생과 이직자 여러분. 나와 같은 굴러온 돌 처지의 모든 이에게 살가운 응원의 한마디를 건네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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