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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May 28. 2021

혼밥하면 생기는 일

신대륙 발견은 아마도 이렇게, 우연히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알람까지 맞춰가며 신청한 박물관 북토크에 당첨되었다. 코시국으로 인해 많은 강연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나니 모처럼 찾아온 기회가 어찌나 고마운지.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미리 전시도 보고 밥도 든든히 챙겨 먹으려 재촉한 걸음이 한여름 아사 블라우스 마냥 나풀거린다.


기왕이면 이 동네에서 제일가는 맛집에 가보지 싶어 검색한 곳에 가보니 이미 한 시가 넘은 시간에도 줄이 계단 밖까지 늘어있다. 어쩐담. 잠시 망설이는 동안 줄줄이 계산하고 나오는 행렬 끝에 드디어 내 차례. 그런데 딱 하나 남은 자리가 하필 5인석이다. 되도록 점심 피크시간대는 피하고, 2인석 이하의 자리를 골라 앉는 혼밥인의 예의범절이 뜻하지 않게 무너지는 순간이다.


"혹시 괜찮으시면 다른 손님과 합석하셔도 될까요? 불편하시면 안 그러셔도 돼요."


안 그래도 문 밖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두고 이 큰 테이블을 독차지하기가 미안했는데 머리 위로 귀인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물병을 내주며 조심스럽게 물어봐주는 세심한 배려. 그 또한 어찌나 따뜻하던지.


"불편하긴요. 오히려 좋은데요?"


우여곡절 끝에 내 대각선 자리에 앉게 된 그녀.

오십 대 후반에서 육십 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지적인 느낌의 어른이었다.


난 보통, 그녀는 특 도시락.

주문이 들어갔다.

특을 시켜볼까 하다 양이 너무 많아 강연 때 꾸벅꾸벅 졸까 봐 끝내 포기한 메뉴를 그녀가 시키니 내심 반가웠다.


그렇게 밥을 기다리며 시작된 초면의 낯선 대화.

마침 내가 보려는 전시를 막 감상하고 점심을 먹으러 나선 길이라 했다.

평일 오전부터 전시를 찾아다니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생동감이 눈에서 타닥-하고 반짝였다.

나이 불문하고 마음이 더없이 싱그러운 분이라는 느낌이 왔다.


얼마 전 다녀온 아트페어 부산과 영월의 새로운 재생 문화공간 젊은달 와이파크 등 내 또래 지인들에게서도 흔히 듣지 못한 예술기행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나 역시 한 번 가봐야지, 결심만 했지 아직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 곳들이었다. 마음만 자주 먹었던 탓에 이미 갔다 온 기분마저 드는 그런 곳들. 나이 들수록 엉덩이가 한없이 무거워진다던데 이 언니(멋진 여자는 좌우지간 다 언니!)는 사뿐사뿐 마음이 동하는 데로 나빌레라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 또한 최근 잔잔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던 덕수궁 미술관의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와 팔판동 갤러리 산책, 그리고 예술 강연 정보 등을 넌지시 알려드리고 밥집을 나섰다. 지하상가의 낡은 계단을 올라오며 얼굴에 쏟아지던 햇볕이 꼭 비 온 뒤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추던 오늘 점심의 그 빛인 것만 같았다. 살가운 이들과 오손도손 나눠먹는 밥맛이야 두말할 나위 없이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우연이 선물해준 귀한 인연에 낚여 즐기는 혼밥의 매력 또한 꽤나 아끼는 이유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제.

사전 예약해놓은 전시회 방문을 취소할까 말까, 귀차니즘의 부름을 세차게 받는 아침이었다.

그때 신기하게도 지난주 혼밥 동지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엔 역시 미술관 나들이죠."


그렇다.

잠시 스쳐 지나간 한 시간 남짓의 인연이지만, 그녀가 남긴 자그마한 족적은 신기하게도 아직 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그녀의 원격 응원으로 향하게 된 전시회는 비에 젖은 운동화의 눅눅함도 잊게 할 만큼 깊은 독주 같은 여운을 남겼다. 눈 앞에 펼쳐진 초상화 한 점 한 점 빠져들며 그 시대, 그 애끓는 사연에 빙의되어 보고 있자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스쳐 지나갔던 크고 작은 우연한 인연들이 떠올랐다. 가족이나 절친들과의 추억은 옴니버스식 영화 같은 생생한 영상미로 남았다면, 이렇게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들은 스틸컷이나 초상화의 형태로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것은 아닐까, 하고.


<안나 윈투어>, 알렉스 카츠, 2009,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그러다 전시 중간에 또다시 마주친 그녀.

비 오는 날 한 줄기 쨍한 햇살 같던 혼밥 동지 그녀는, 이처럼 짱짱한 샛노랑의 안나 윈투어로 내 마음속 초상화 미술관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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