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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un 10. 2021

간고등어가 엮어 준 인연

친구보다 새롭고 때론 지인보다 살가운

난 고등어를 좋아한다. 진짜 꼬순 고등어구이를 만난 날은 감히 사랑한다고도 당당히 고백할 수 있다. 동네 단골 생선구이집에서 늘 고등어구이를 먹다가 '오늘은 삼치가 참 좋은데...'라는 주인아저씨의 언질에 귀가 펄럭여 모처럼 삼치구이를 시킨 날. 뭔가 헛제삿밥을 먹은 느낌이었다. 삼치는 담백하지만 어쩐지 좀 샌님 같고 숙맥 같다. 고등어의 저 깊고 깊은 감칠맛을 따라오려면 해저 몇 만리는 더 유영하다 와야 한다.



며칠 전 간고등어를 먹으러 충동적으로 안동행 기차를 탔다. 기차 덕후로서 안 그래도 올해 새로 개통한 KTX 이음을 타볼 핑계를 찾던 참이었다. 오전에 할 일을 마치고 느지막이 11시 26분 차에 탑승. 철도 도시락을 다룬 에키벤이라는 만화를 즐겨보던 터라 코로나로 인해 열차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다. 하지만 괜찮다. 내겐 한 시간 반이면 궁극의 맛을 선사할 양반마을의 짭조름한 고등어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새로 이전한 안동역에 내리니 잠시 의식의 혼란이 찾아왔다. 관광안내소에서 버스시간표와 지도를 받아 들고 나오니 해외여행에라도 나선 듯 설레는 마음. 공항 검색대를 연상케 하는 체온측정기까지 통과하니 여행 기분 최고조! 오랜만에 새겨진 이방인의 느낌이 빳빳한 새 옷을 입은 목둘레 마냥 서릿하다.


내게 시내 가는 버스를 물어보는 아주머니가 계셔 벌써 안동사람 다 된 양 으쓱한 기분. 노선도를 보며 같이 버스에 올라 수다 한마당을 펼치다 보니 어느새 저 앞에 앉아계시던 어르신 한 분이 대화에 합류하신다. 알고 보니 이 분도 서울에서 온 고등어 방랑식객. 나와 동류다! 안동역 앞 명인의 맛집이 생각나 훌쩍 기차에 오르셨다 했다. 난 이미 교보생명 옆 식당을 머릿속에 그리고 온지라 이 집은 다음에 가보기로 킵. 버스를 내리는 발걸음에도 벌써 침이 한가득 고인 느낌이다.



어라? 그런데 저 앞에 잰걸음으로 멀어지는 어르신이 향한 곳은 바로 내가 찾던 간고등어 맛집. 윗동네 촌년인지라 교보생명 옆이 (구) 안동역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문 앞에서 둘 다 잠시 파안대소. 두 방랑식객이 함께 안동의 명물을 맛보기로 의기투합했다.


충주에서 사업을 하는 어르신은 다복하게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셨다 했다. 한평생 성실히 일하시면서 짬을 내어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는 런던이나 모스크바로 훌쩍 떠나 경기 직관도 하시는 멋쟁이. 북극과 남극 다녀오신 증명서를 휴대폰으로 보여주시는 모습에서 아직도 쩔쩔 끓는 탐험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50년생이신 어르신은 지금도 표표히 안동으로 또 부산으로 점심 한 끼 드시러  떠나신다 했다. 업무는 틈틈이 전화나 앱으로 처리하신다는 칠순의 디지털 노마드.



딸 같은 마음에 식사도 흔쾌히 대접해주신 어르신께 커피라도 맛 보여 드리려 함께 안동 갈비골목을 걸었다. 맘모스제과를 지나 새로 연 카페에 들어가 흥미만점의 대화를 이어갔다. 에스프레소를 즐기신다는 미식가 어르신의 맛깔난 이야기가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끝도 없이 이어졌다. 카페를 나서며 올 겨울엔 나도 귀띔해주신 승부역 협곡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 버금가는 설경을 마음에 사각사각 얼려오리라, 다짐했다.



안동에서 돌아온 후에도 어르신과 휴대폰으로 펜팔 하듯 짧지만 정 깊은 문자가 오갔다. 한가득 수확하신 앵두를 상하기 전에 보내주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 돌아가신 아빠 생각에 울컥했다. 이 무더위에 상자 포장해서 우체국까지 가셔야 할 어르신을 생각하니 그 마음만 받아도 이미 가슴속이 온기로 차고 넘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다 이렇게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요, 형제자매라 생각하면 인생의 구비구비에서 맞닥뜨리는 누군가와의 낯선 만남도 조금은 따스하게 보듬어줄 수 있지 않을까. 갓 딴 앵두같이 새빨간 심장을 품고 잠에 든 밤이었다.


전기 <매화초옥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충주에 놀러 오면 꼭 연락하라고, 절경을 두루 보여주시겠다고 한 어르신의 말씀 전기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가 떠올랐다. 먼 곳의 벗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마음과 그 벗을 만나러 가는 길의 설렘을 이보다 더 싱그럽게 표현한 작품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소담한 초가집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친구를 그리는 이는 역관이자 서화가인 오경석. 호를 '역시 매화'인 역매(亦梅)라 지을 만큼 매화꽃 감상에 진심이었던 오경석은 열흘 남짓 짧게 피었다 사라지는 매화를 보며 이 꿈결 같은 눈꽃 향연을 함께 하고픈 지기를 떠올린다. 그는 다름 아닌 고람(古籃) 전기(田琦). 설중매의 아름다움도 물론이지만, 더없이 애틋한 벗과 함께 하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눈보라를 뚫고 다리를 건너는 전기의 붉은 마음이 저 싱싱한 앵두와 닮아있다. 흩날리는 눈송이도 매화꽃잎도 실은 그를 기다리는 오경석의 기다림이 팝콘처럼 팡팡 터지는 자태는 아니었을까.


마음을 열면 새로운 벗은 우연히 간고등어 집에서도 조우할 수 있다.

예측불허의 봄바람이 매화꽃잎 같은 인연을 삶 속으로 불어넣어 주는지도 모를 일이다.

빠알간 앵두처럼 우정은 또 초여름 햇볕에 영글어가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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