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글의 감성과 그림이 예쁜 책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를 단숨에 읽어 버렸어요

by 벽우 김영래

개취이기도 하려니와 사고 깊이가 얕아서 그렇긴 하겠지만 글씨가 작고, 너무 철학적이어서 행간을 더듬이 더듬듯 살금살금 읽어 내려가다가 앞 내용을 잊어 리바이벌하듯 되돌아 가 훑어보게 만드는 책은 서너 장을 넘기지 못하고 장식장으로 옮겨진다. 그건 다시 손에 잡혀 올 일이 1도 없음이 확실하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업무포털 뉴스란에 지역 사람이 쓴 책이 소개되었다. 인터넷 서점을 뒤져 미리보기로 잠깐 봤더니 소소한 일상을 쓴 에세이였다. 바구니에 넣어 뒀더니 아내가 학습지 사면서 함께 주문해 줬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한순 지음, 김덕용 그림(나무생각)

요즘 트렌드가 귀농, 귀촌, 전원주택 같은 것들인데, 이 책도 도시에서 사일 시골에서 삼일을 사는 출판사 사장님이 쓴 글로 엮었다. 총 4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장이 계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계절의 상황에 맞는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부딪치고 떠오르는 추억들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거기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심심할 틈이 없다. 시 같은 짧은 글과 그림이 마음을 붙든다. 또 무심천과 모충동 등 아는 동네가 등장하니 어렴풋하게 엷은 추억이 얹어졌다.

시 같은 짧은 글들은 이렇다.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봄비 한 번 내릴 때

우리도 한 번 착해지고

봄 새순 고개 내밀 때

묵은 감정에 숨구멍 생기면 좋겠다.

이름하여 너도 봄, 나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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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시 같은데 시는 아닌 것 같고, 일기처럼 주절거리는데 마음을 움직여 한 번 따라 적어보게 만드는 감성이 느껴진다.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는다. 나무에 단청기법을 한 멋진 그림들이 중간중간 눈 호강을 시켜주기 때문이다. 나뭇결 사이로 꽃과 여인과 잠자리, 장독대, 달 등이 그려진 그림은 시선을 오래 잡아 둔다. 곳곳에 나이테 무늬와 옹이의 어울림이 절묘하다.


햇살에 봄 들어 있다. 나무들이 봄 몸 살을 시작하려 겨울 가지 주변에 붉은 아우라를 씌운다.(p27) 버겁도록 아름다운 것들이 마구 피어나는 계절이다.(p73) 저기서 무엇인가 다가온다. 절정을 뽐내던 배롱나무 꽃잎이 살짝 그늘을 드리우며 주름 끝 수분을 안쪽으로 거두던 날. 꽃분 홍빛 배롱나무 그늘에 앉아 먼 곳에서 다가오는 무엇을 바라본다.(p136) 새의 속도가 느려졌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앉아 말이 없다. 나뭇가지 사이로 빈 하늘을 보는지, 떨어진 낙엽들 사이에 쌓인 잔설을 보는지 알 수가 없다. 새와 나는 서로 침묵을 겨루듯 조용하다.(p180) 추억과 일상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 잔설처럼 드문드문 계절을 녹여놨고, 시골에서 삼일, 도시에서 사일이라는 당초의 계획은 시골에서 오일, 도시에서 이 일 정도로 급격하게 무게 중심이 기울 거라는 예측을 하게 만드는 필자를 만나게 된다.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자연의 정의를 인용하면서 자비와 무자비는 서로 반대 개념으로 다른 쪽에 서 있어야 하나, 요즘 나에게는 그들이 다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고리로 보인다. 고리에 고리에 고리를 연결하면 나도 그곳에 연결될 것이고, 인간도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자명해질 것(p74)이라는 글에서도 나의 추측에 힘을 실어 준다.


식물이 떨어뜨린 씨앗 하나가 생명의 움을 튀우기까지, 두더지는 포슬포슬하게 땅을 일궈놓고, 빗방울은 대지의 목마름을 적셔놓고, 또 낙엽은 이불을 덮어 온기를 지켜준다. 무심한 듯 자신의 일을 하지만, 이런 무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을 빚어낸다. (p204) 자연의 순환과 그 속에 묻혀 책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친 일상들을 쉬고 있는 필자는 이런 자연 속에서 느끼는 여유로움으로 이런 책을 기획하지 않았을까.


연둣빛 봄에서 시작해 초록이 성숙한 여름과 나뭇잎의 밀도가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순백의 풍경에 칩거하는 겨울을 맞는 동안 등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외삼촌과 모피코트와 고라니와 뱀과 굴참나무와 배롱나무와 남보랏빛 각시붓꽃과 산부추 꽃과 무엇과 무엇과 무엇들...

때론 무거운 주제로 때론 가벼운 추억으로 만나게 되는 것들이 편하고 아름답게 엮어졌다. 아침에 시작해 하루 종일 좋은 글들은 따라 써 보기도 하고, 그림들은 미술관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보기도 하면서 여유 있게 한 권을 훌쩍 다 읽어 버렸다.


책을 읽다 보니 학창 시절에 배운 '청빈낙도', '단표누항', '안분지족'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살면 좋겠다는 부러움이 생겨났다. 계절에 순응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삶이 간절한 요즘이다.

도시의 삶도 놓을 수 없지만, 시골의 삶이 동경스러우면 <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를 읽어봐야 한다. 필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화로운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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