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그리운 시절

기둥처럼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나이테에 고스란히 기록된 추억들

by 벽우 김영래

나의 초등학교는 운동장이 무성한 풀밭으로 변해 잊혀진 기억 같은 곳이 돼 버렸다. 한때는 지적 박물관으로 운영되다 지금은 그나마도 사람이 찾지 않아 흉가처럼 방치돼 있다. 그곳을 먼 풍경으로 지나치며 볼 때마다 아련한 그리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가지 잘린 채 기둥처럼 서 있는 플라타너스는 고무줄 묶고 놀던 여자애들 관심을 끌기 위해 칼로 자르고 도망가던 치기 어린 추억과 숨바꼭질 놀이 때 작은 몸을 숨겨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때론 넘치는 힘을 이기지 못해 던진 돌을 맞으면서도 묵묵히 버텨준 부모 같은 존재다. 이 많은 기억들을 켜켜이 기록한 나이테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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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년이 한 반이었던 우리는 1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함께했다. 교사(校舍) 뒤편 밭에서 리어카로 흙을 실어 날라 운동장을 만들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잔머리 굴리는 친구가 내리막 급커브길을 힘차게 돌려 펑크를 내면 일이 끝났다. 동네 리어카가 성한 게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토끼 사육장이 있어 동네별로 풀을 뜯어오는 당번이 정해져 있었다. 그때 그 많은 토끼들은 어디로 갔는지? 겨울이면 한 집당 한 가마니의 고주박(나무 썩은 그루터기)을 가져가야 했다. 그걸로 교실 난로를 피워 난방을 했다.

교육청 주관 축구대회는 신나는 일이었다. 남학생들 전부가 선수가 되었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경기 결과는 뒷전이었다. 시내 구경을 한다는 기대감과 선생님이 사주던 짜장면의 맛난 기억만 있다. 시험 전 날 한 두서너 시간 공부를 하면 일등을 했고, 놀이에 지쳐 밥상 밑에서 잠들면 뒤로 밀렸다. 앨범에 모아 둔 성적표를 보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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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는 추첨을 했는데 시내에서 제일 먼 학교로 배정되었다. 버스를 한 번 타고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고모네 집에서 자취도 했고, 10km가 넘는 오르막 길을 자전거로 통학도 했다. 3년의 절반은 지각을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갔다. 나름 지역의 명문학교로 갔을 때 부모님도 나도 자부심이 컸는데 성적은 좋지 못했다. 초, 중학교 때처럼 벼락치기로 될 수 있는 공부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 통틀어 결석은 한 번도 안 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12년 개근을 자랑스레 얘기하신다. 내게 학교는 빠지면 큰일 나는 곳이었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그 친구들이 지금 서울, 베트남, 인도 등 지구촌 곳곳에서 살고 있다.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다 보면 나오는 말이 우리 언제쯤 다시 그 추억 속에 함께 모여 살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코로나 끝나고 나이 조금 더 먹으면 반가운 얼굴들과 다시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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