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강의를 마치며

떨림으로 준비하고 새로운 열정을 얻다

by 벽우 김영래

배틀에서 옷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일정한 순서들이 반복되도록 설계된 공정 속에서 완성에 이른다. 설계과정은 과학적 지식들이 동원되고 집착 같은 노력이 맺은 결실이지만 그 이후는 보기에 딱할 정도로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반복 놀음이다. 새로움이 삭제된 틀 안의 연속일 뿐이다. 인생도 이와 같이 잘 짜인 공정 속의 일이라면 너무도 절망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 다가오는 시시각각의 순간이 우연으로 짜인다. 얼핏 보면 계획된 패턴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미세한 핸들 조작에 움직이는 바퀴가 매일 같은 길을 달리지만 매 순간 다른 지점의 아스팔트를 밟으며 달리는 것과 같다. 이렇듯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대부분 일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인생이란 같은 듯 다른 새로움에 둘러싸여 늘 경이롭다.


지난 4월 어느 날 인문학 강의 제안이 왔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나 찾아 뜨문뜨문 책을 읽는 것이 전부인 나를 한편 당황스럽고, 한편 설레게 만들었다. 강의란 교수 직함 정도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닌가. 남 앞에 내세울 만한 스펙 하나 없는 말단 공무원이 마주한 제안 앞에 황송하고 당황스러웠을 뿐 아니라 바람 빠진 풍선처럼 초라해져 어찌 답을 해야 할까 망설였다. 짧은 순간에도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러나 도전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실망시킬 거절보다 훨씬 우선했기에 뒷감당이야 어찌 되든 욕심을 앞세워 오케이 해버렸다.


전공을 놓고 다른 전공으로 산지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희미해지고 군데군데 지워져 조각난 지식들을 꿰매고 다시 잇는 작업이 큰 두려움으로 나를 압도했지만 처음처럼 새로운 도전의 기쁨이 위안처럼 끝까지 함께 했다. 도전을 수락한 첫날부터 중압감은 엄청났다. 중요한 업무를 결정하는 순간에도 문득문득 강의 서사들을 생각했고, 중, 고교시절에 외웠던 시나 가사들을 찾아 외웠다. 그것들이 강의에 활동될지 여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기본 없는 지식이 금세 바닥을 드러낼까 하는 염려 때문에 관련 지식을 폭넓게 공부를 해야만 했다.

내 강의 계획과 주관부서의 요청 사이에 이견이 좀 있어 제목을 서너 번 바꾸고 방향이 정해졌다. 막막함 속에서 매일매일 강의 생각에 집중했다. 빈 스펙의 초라함을 채우기 위해 전공 책들을 다시 읽었고, 관련 서적들도 구입했다. 석 달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제1강 '계절이 오는 길목 - 삼한의 초록길'에서는 제천의 명소를 토대로 걷기와 인문학을 연관 지어 강의할 계획으로 리베카 솔릿의 [걷기의 인문학]과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정독했다. 그런데 이 책들은 과분하게 철학적이었다. 처음엔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고 삼한의 초록길 걷기를 통해 사색과 문학을 연관 지어 소개하고, 가볍게 시작하는 에세이 쓰기에 관한 유명 문인들의 노하우와 나의 작은 팁들을 설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본 텍스트의 저자가 구설에 휩싸여 많은 내용을 소개하고 인용하기가 부담스러워져 글쓰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에코브리지 완공으로 새롭게 단장된 삼한의 초록길을 여러 번 답사했고, 걷기 예찬과 관련 인문학 서적에서 배운 내용과 평소 교재처럼 보던 글쓰기 책들을 토대로 원고를 완성해서 제출하고, 유튜브의 유명강사들의 기법들을 참고하여 강의 순서와 서사를 완성했다.


제2강은 '청풍에서 그리운 옛이야기를 들어보자 - 류정환의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로 정했다. 첫 번째 강의보다는 덜 부담스러웠다. 전공서적을 꺼내 보는 것도 새로웠고, 인터넷에서 문예사조와 근, 현대를 살아온 충북의 문인들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 공부하는 재미가 있었다. 옥천의 정지용, 보은의 오장환, 괴산의 홍명희, 충주 권태응 등 유명 문인들, 이름을 잘 알지 못했던 무명작가(나만 몰랐던 사람들)와 지역에 얽힌 이야기로 원고를 완성하고, 강의 서사를 짰다.

류정환 작가는 대학 동기로 교재로 선택한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는 그가 2016년 충북지역의 문학유적을 다니며 쓴 글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그의 온화하고 다정한 인품과 글의 힘이 느껴지는 좋은 문장들이 많음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다.


강의 일주일 전에 도서관에 들러 파워포인트를 띄워 보려 했더니 빔프로젝트의 젠더가 노트북과 호환이 되지 않았다. 부랴부랴 노트북에 맞는 잰더를 새로 준비했지만 강의 날엔 디스플레이가 맞지 않아 깨진 화면으로 강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 전날 아내가 갑상선 수술을 하는 일정이 겹쳐 병실에서 밤을 새워 몸은 피곤했지만 그 와중에도 부담감을 떨치기 위해 병실에서 강의 리허설을 몇 번 했던 열성 덕분이었는지 만족할 순 없었지만 순조롭게 끝낼 수 있었다.

설레고 긴장됐던 첫 강의에서 자신감을 얻어 두 번째 강의에서는 충실한 내용을 담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국문학 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네 달여에 걸친 인문학 강의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잊고 있던 감성을 되찾은 것이 큰 성과였다. 청강했던 사람들의 평가가 궁금하고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얻은 자신감은 무엇보다 컸다. 솔직히 내 강의를 들었던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내가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정보통신과 첨단산업이 발달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와 지금도 여전히 문학이 필요한 시대인가 라는 물음에 내 나름의 정리된 답을 찾은 소중한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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