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계절을 넘기는 삼한의 초록길

초록이 클라이맥스로 치달리다 바람을 만나 한 계절이 넘어간다

by 벽우 김영래

제천에는 도심 옆으로 청전동에서 의림지까지 이어지는 1.5km 정도의 산책길인 삼한의 초록길이 있다. 이렇게 도심 가까이 있는 멋진 길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등산도 아니고 산책이라 하기엔 좀 먼 자드락길이나 둘레길 같은 트레킹 길이 아니다. 삼한의 초록길은 도심과 함께 있다. 아파트 사이 4차선 길을 건너면 바로 시작된다. 역사책 첫머리에 등장하는 의림지까지 연결된다. 체력이 넉넉한 사람들은 까치산 또는 7백여 미터 높이의 용두산까지 올라갔다 오면 족히 3만 보를 채울 수 있는 확장성이 있다.


삼한의 초록길 칭찬이 여기서 끝나면 '그냥 그렇구나' 심드렁하고 밋밋하다. 반전을 이 길이 세상에서 가장 휴머니즘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아는 길의 형상을 떠올려 보자. 중앙의 잘 정리되고 반듯한 곳은 언제나 자동차가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자리로 나오면서 적선하듯 남겨진 자투리에 겨우 서너 뼘 너비의 자전거 길이 있다. 그리고 경계석을 올라서면 교통표지판과 가로수와 전봇대가 경쟁하듯 서 있고, 상가에서 내놓은 가판대에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차지하고 있다. 그 빈 틈으로 간신히 보이는 공간은 마주오는 사람의 어깨가 부딪칠 만큼 좁다랗게 인도가 보인다. 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건지 그냥 구색을 맞춰 논 건지 알 수 없는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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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 초록길은 다르다. 가장 중심부에 인도가 있다. 곡선의 미학을 살린 저 멀리 굽은 흙길이 돌아서면 나타나고 돌아서면 나타난다. 푹신한 흙이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스펀지처럼 받치고 있다. 양 옆으로 작은 동산에 키 작은 측백이나 화살나무로 울타리를 세우고 소나무와 청단풍, 마가목, 모감주나무의 큰 키가 그늘을 만든다. 틈새로 새어드는 햇살을 받는 희고, 붉고, 때론 자잘한 꽃들이 심심한 풍경을 장식한다. 울타리 너머로 자전거 길을 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차도가 있다. 차들은 걷는 이의 눈치를 보느라 창문도 열지 못하고 좌불안석으로 도망치듯 달린다. 이 정도면 세상에서 가장 휴머니즘적인 길이라는 주장이 합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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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나무, 마가목, 양버들(미루나무), 벌개미취, 청단풍, 모감주나무, 화살나무, 구절초, 꼬리조팝나무 등등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퍼레이드를 펼쳐주는 길에선 오롯이 내가 홀로 주인공이다. 풍경이 좋아 사색을 잊을 지경이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마음이 함께 머문다. 구순의 어느 시인은 '색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것'(중앙일보, 21.09.27 구순의 박서보 화백... 기사 중)이라고 했다. 여름의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시간, 초록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받느라 짙어질 대로 짙어졌다. 한 줄기 바람이라도 불면 금세 새로운 계절로 페이지를 넘기려 엉덩이를 들썩인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사회변화 속도가 엄청 빨라지며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온 지구가 스트레스 병동이 됐다. 21세기 예술은 치유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노화가의 주장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삼한의 초록길이 바로 치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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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곧 신록을 거두고 새로운 색깔로 치유를 계획하고 있다. 황금색의 도화지 들판 위로 노랑, 빨강, 주황 등 형형색색들로 화가 그린 그림보다 더 이쁜 그림으로 사람들을 위로할 것이다. 삼한의 초록길은 봄은 봄 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과 겨울은 각각 그 계절별로 사람을 치유하는 자연 병동으로 존재할 것이다. 언제든 내 발이 닿기만 하면 부드러운 손길로 마음을 위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다치고 깨진 마음이 있다면 부디 이곳에 닿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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