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듯한 햇살 위로 검은 구름 한 무리가 지나갔다. 그리고 포도송이 같이 주렁주렁 달린 노란 마가목 열매와 양버들 잎 사이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피부에 차갑게 와닿았다. 가을이 곁에 와 있던 것이었다. 새벽부터 숲 속에서 들리는 매미 소리가 유난스럽게 귀를 찢는다. 이미 그들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을 테지. 땅거미 진 흙마당 여기저기로 내려와서 다시 날개를 펼칠 힘을 잃었다. 베란다엔 사마귀, 여치 등 풀벌레들도 힘겹게 날갯짓을 하면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은 부르지 않아도 득달같이 달려올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찬 기운을 한 줌 더 얹어 열린 창으로 한가득 보내왔다. 여름엔 올 수 없어 미안했다며. 신록이 짙어지다 못해 검게 변해 갈 무렵 뿌리에서 가장 먼 잎부터 비워내 열매에 담기 시작한다. 벼이삭이 통통하게 맺히며 고개를 숙여가고, 노란 마가목 송이도 끝에서 붉은색을 띠기 시작한다. 꼬리조팝나무는 보라색 솜털 같은 꽃송이를 위에서부터 떨구며 내려오고 있다. 키 큰 미루나무 푸른 잎은 바람에 팔랑이며 물비늘처럼 반짝인다.
들판에서 마른 잎새들이 풍기는 바삭한 냄새들이 풍겨오기 시작하면 이미 가을은 고갯마루에 올라 급히 떠날 채비를 한다. 허수아비만 남겨진 빈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살의 기억을 지울 만큼 차가워진다. 가을은 짧게 왔지만 긴 여운을 남기고 간다. 한 계절의 공백을 버텨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생명의 기억들을 열매에 담아 이곳저곳으로 흩뿌린다. 잎새들도 붉거나 혹은 노랗게 타는 듯 장렬한 아름다움을 남기고 바람에 스러진다.
모든 계절은 바람에 묻어온다. 올 가을이 그렇게 왔다 가고 나면 , 겨울이, 봄을 지나 여름이 바람에 날아온다. 그리고 다시 이번 같은 가을이 또 순식간에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