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두워질수록 불안해졌다
바람의 언덕에 올라 코발트색 바다 같은 광활한 하늘이 보고 싶었다. 코로나19로 갇히지 않았지만 갇힌 삶이 안갯속처럼 답답하게 계속되는 일상에서 하루쯤 마음을 뉘어 쉬고 싶었다. 문득 생각난 곳이 태백에 있는 매봉산 바람의 언덕이었다. 작년에 처음 올랐을 때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과 파도처럼 넘실대는 아스라한 산 능선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고랭지 배추는 8월 말이면 수확이 끝나 올라가는 길은 문제없을 테고. 물과 고구마 등 간식을 싸다가 느닷없이 받는 보너스 같은 대체휴무가 하루 더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떠 어디 더 갈 곳이 없을까? 갈 수 있는 데까지 무작정 가보자는 심산으로 작은 가방을 꺼내 여벌 옷과 칫솔까지 챙겼다.
의도하지 않게 높은 곳을 가는 테마로 길을 떠난 김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기차역인 추전역이 중간에 있어 들렀다. 여객열차뿐 아니라 화물열차도 서지 않고 기차 운행만 조정하는 폐역이나 다름없는 역이 됐지만 상징성 때문인지 그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뜨문뜨문 있었다. 특별한 풍경 없이 바람개비만 저 혼자 신나게 돌고 있었다. 카페를 했던 열차는 길을 잃고 페인트가 벗겨진 채 낡아가고 있었다. 무관심의 시간이 데리고 가는 곳은 늘 그랬다.
매봉산 바람의 언덕은 예상대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산비탈에 빼곡했던 배추들은 수확을 마쳐 휑한 돌멩이 밭만 보였고, 저 멀리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는 풍력 발전기의 날개가 씽씽 돌고 있었다. 비탈길을 오르는 길은 좁고 험했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과연 정상에 오르니 바람의 언덕답게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처음 갔을 땐 바람의 언덕에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이상했던 것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것들은 내가 늘 가까이서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키가 컸던 나무들과 길과 자동차들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고, 크기가 가늠되지 않던 산도 작은 능선으로 모양을 드러냈다. 매일 익숙했던 풍경을 보던 시각이 언덕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새로워졌다. 바람까지 온몸을 씻듯이 세게 불어줬다.
나는 바람을 좋아한다. 추우면 추운 데로, 더우면 더운 데로 머물지 않는 방랑자 같은 바람. 어디든 갈 수 있고, 생김도 색깔도 없다. 정체가 없는 것 같은데 정체가 있는 신비감이 있다. 더운 여름날에 맞는 바람이야 옛 친구처럼 반갑지만, 겨울 면도날 같은 찬 바람도 맞고 나면 몸이 시원해진다. 바람은 언제나 자유 같아서 좋다.
한참 동안 바람을 맞고 난 후 울진 바닷가로 향했다. 한 시간여를 달려 죽변항에 도착했다. 내비게이션의 안전주행 모드를 켜고 해안길을 달렸다. 두 시가 훨씬 넘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작은 고구마 서너 개가 허기를 메워준 듯했다. 왼쪽으로 바다 풍경을 끼고 달렸다. 오른쪽엔 산 밑으로 집이 서너 채씩 혹은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어느 곳엔 빈 집들이 연속되기도 했다. 엊그제 같은 작은 꿈들이 시간 속에 쇠락해가는 모습 같아서 애잔했다.
지난번 친구들과 여행할 때 먹었던 고소한 버터구이 오징어가 생각나 그곳을 찾다가 길을 헤맸고, 결국 아내에게 꾸중 같은 타박을 듣고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후포항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이래저래 잘 풀리지 않는 데다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 잘못은 아닌데. 제주도 빼고 대한민국 어디를 갔다가도 잘데 없으면 집으로 되돌아오면 되지. 좀 피곤할 뿐이야. 그 생각으로 길을 떠났는데 생각 뒤로 어둠처럼 스멀스멀 젖어오는 불안은 뭐지. 늘 갈 곳, 잘 곳을 정해 놓고 움직이는데 익숙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근처 펜션을 검색하니 숙소가 없다는 회답이 그런 기운을 보테고 있었다. 고구마로 때운 점심이 부족했는지 허기가 찾아왔고, 오랫동안 운전한 여파에 피곤도 몰려왔다. 언제나 나쁜 것들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시골 어촌엔 밥을 먹을 만한 식당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간신히 숙소를 찾았는데 두 사람이 쓰기엔 크고 비쌌다. 그냥 나왔다. 겨우 찾은 식당에 들어가니 아내가 싫어하는 칼국수 단품 메뉴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사람들로 붐볐다. 겨우 식사를 하고 다시 펜션을 찾아가 가격 협상을 하고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창을 여니 파도 소리가 들리는 낭만적인 방에서 낭만을 접어 둔 채 주말 드라마를 봤다. 광고 타임에 어둠이 내린 밤바다를 5분 동안 걷고 와서 다시 드라마에 몰입했다. 사이버 공간 같은 창밖의 어둠 속에서 들리는 새로운 청감이 여행의 피로를 달래줬다.
지금까지는 계획을 따라가는 여행만 했었는데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붐벼서 유명한 여행지보다 내가 찾아가서 나만의 명소를 만드는 여행. 인생에 정답이 없듯 내가 정답을 만들어가는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 나를 자꾸 길 위에 서게 할 것 같다.